스포츠는 폼이다

난 운동을 싫어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좋아하는데 몸을 써가며 하는 것은 정말 싫다.

석유화학 공장은 2~3년에 한 번씩 대정비 작업(Turn Around)을 한 달 동안 진행하는데 사전작업 기간을 포함해 서너 달을 야근과 밤샘작업으로 지샌다. 봄철에 시작한 정비작업이 끝날 즈음 어느새 여름이 다 되곤 한다.

1999년. 대정비 작업이 무사히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담당 임원은 부하 직원들의 체력이 너무 떨어졌다며 축구를 반강제로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서 몸 쓰는 걸 싫어하는 부류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지만 워낙 강력한 직급의 압박으로 할 수 없이 유니폼을 맞추게 됐다.

평소 숨쉬기 운동만 하던 이들에게는 고문에 가까웠다. 운동을 좋아하는 몇몇 직원들 빼고는 대부분이 냅다 뛰어올라가면 상대편 골대 부근에서 서성거리기만 했지 되돌아오지를 못했다. 하프라인을 건너 내려올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주 한두 경기를 하기 시작했고 서너 달이 지나 가을 무렵에는 제법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포지션이란 개념도 생겨서 상대방 골대까지 갔다가도 이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정도까지 발전했다.

안전축구를 지향하며 부상당하지 않게 태클은 절대엄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 공을 잡으면 가로채기 금물. 그분들은 가만히 냅둬도 제풀에 지친다. 운동 신경이 없는 나 같은 사람끼리는 뛰어가다가 제어를 못 해 부딪히는 경우가 있지만 불가항력이요 천재지변이라 서로 용서가 된다.

깡패 같은 계급에 눌려 시작한 축구는 2개 있는 운동장을 사전에 예약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될 정도로 전사적으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혹 동문 체육대회라도 참석했던 직원들은 그렇게 시작한 축구 덕에 운동장을 날아다녔다고 자랑도 했다.

덕분에 나도 축구 유니폼이 세 벌이나 있다. 여러 팀을 만들다 보니 세 개 팀에 소속이 됐다. 가지고 있는 유니폼 한 벌 가지고 대충 입고 뛰자는 것을 "스포츠는 폼이다"라는 평소 지론을 내세우며 우기는 바람에 대부분이 서너 벌을 가지게 됐다.

나는 유니폼이 통일되고 용도에 맞아야 한다고 우겼다. 반바지에 맨발로 축구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조금 허름해 보인다. 그렇다고 노란색 이소룡 츄리닝 입고 하기도 그렇고. 축구할 때는 축구 유니폼을 입어야 하고 등산할 때는 등산복을 입어야 한다고 우긴다. 폼이라도 잡아야 50% 먹고 들어가니까.

물론 스포츠는 실력이 중요하겠지만 그전에 구색에 맞는 유니폼을 갖춰 입어야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다. 예비군복을 입혀 놓으면 아무 데나 퍼질러 앉아 신문을 보게 되지만 정장을 입고는 바지에 주름이 생길까 의자에 앉는데도 조심스러워지게 되듯이 말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포츠는 폼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운동장에 나와 경기를 시작하려고 하프라인 근처에 두 줄로 서 있는 팀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팀이 이길지 예상이 된다. 유니폼을 통일해서 딱 맞춰 입은 팀이 대부분 승리를 한다. 상의가 울긋불긋 섞여 있어 할 수 없이 조끼를 입고 뛰는 팀이 무승부는 할지언정 승리하기는 가뭄에 콩 나듯 어렵다.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고 적중하곤 한다.

그렇게 운동을 싫어하던 나도 그해 십일월 국제규격 축구장에서 난생처음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하게 됐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