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과 칼국수

칼국수
호랑이 불알은 동지부터 얼었다가 입춘에 녹는다고 했지만 날씨가 겁나게 춥습니다. 콧물이 슬쩍 나오다가도 화들짝 놀라며 도로 기어들어 가는 날씨입니다. 어릴 적 생각을 하면 그리 놀랄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닌데 내가 뀐 방귀조차 지구 온난화에 일조한 덕분에 삼한사온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점점 따뜻한 겨울을 지내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날 부는 바람을 칼바람이라고 하죠. 칼로 도려내듯이 매섭고 독하다고 그렇게 부르죠. 칼바람 부는 날은 멸치국물로 맛을 낸 따뜻한 칼국수가 생각납니다. 요즘이야 온갖 해물이 들어가 육수 맛은 더 풍족해졌지만 먹거리 없던 시절, 밀가루 반죽을 해서 홍두깨로 넓게 밀고 부엌칼로 숭숭 썰어 멸치와 감자를 넣고 끓여 주시던 어머니표 손맛 칼국수가 그리워집니다. 반죽을 썰다 남은 꽁다리를 화덕에 구워 먹으면 어쩜 그리 맛있었는지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칼국수를 좋아합니다. 한여름에도 가끔 허름한 단골 칼국수집에 가곤 한답니다. 청양고추와 다대기를 풀고 얼큰하게 한 그릇을 비우면 오뉴월에도 시원 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칼국수만큼 엄동설한에는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고 삼복더위를 시원하게 느끼게 해주는 음식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칼국수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칼국수라는 말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칼국수라는 말을 쓰면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는군요.

칼국수 주문을 하면서 "칼은 빼고 주세요"라든지 칼국수가 나오면 "어라. 칼이 안 들었네!"라는 농담을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줄 압니다. 외국인들이 칼국수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농담으로 했지만 정말 칼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칼바람 맞았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디에 칼 맞았느냐며 화들짝 놀라면서 911에 전화를 할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칼바람, 칼국수라는 말에 놀란 외국인을 안심시키고 추락한 신인도를 만회하는데 20억 원(단위가 원인지 달러인지는 모르겠음)이나 썼다고 얼핏 들은 것도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허위사실 유포죄라 함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라고 하니 특히 전화로 칼국수를 주문하거나 예약하면 안 된다는 말씀 되시겠다. 더군다나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허위사실 자체를 처벌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하니 엄청나게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어린쥐를 좋아하는 나라인지라 이참에 칼국수도 handmade knife-cut noodles로 불러야 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칼퇴근해서 칼바람 맞고 싸돌아 다니지 마시고 냉큼 집으로 달려가 뜨끈한 칼국수 한 대접씩 드시기 바랍니다. 조금 모자란다 싶으면 꽁보리밥을 말아 먹으면 안성맞춤이죠. 어쩌면 칼바람 부는 요즘에 먹는 칼국수가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그 이름을 부르며 젓가락질하는 최후의 칼국수 만찬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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