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밌을 것 같은 천추태후

천추태후

〈대왕 세종〉을 끝으로 주말 사극이 없어졌던지라 리모컨과 함께 춤을 추던 내게는 무료한 주말 저녁이었다. 더군다나 〈대왕 세종〉을 시작하던 초창기에는 들여다보곤 했지만 〈대조영〉만큼 칼싸움하는 볼거리가 없던지라 본방 사수를 하지 않다가 이내 시청하는 것을 단념했었다.

연초에 새롭게 〈천추태후〉가 방영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요즘 사극의 대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1, 2회는 칼싸움으로 눈길을 끌더니 3, 4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역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는지라 이야기가 늘어지고 칼싸움하는 횟수가 줄어들면 닥본사 할 자신이 없어지겠지만 조금 더 참아주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고려 시대는 근친혼이 성했던지라 천추태후를 보면서 그네들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여 예전에 사놨던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박영규, 들녘 1996)을 빼들었다. 다음은 그 내용을 짜집기 하였음을 밝혀둔다.

1. 칠대실록

고려 건국 태조 왕건 (877~943)

재위기간 : 918. 6~943. 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 9녀

통일국가를 이룬 왕건이지만 고려의 초기 형태는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쳤다.

왕권안정책의 하나로 실시한 혼인정책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는 좋은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인정책은 그가 죽은 뒤 왕권 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주름살 왕 제2대 혜종 (912~945)
재위기간 : 943. 5~945. 9 (2년 4개월) 부인 4명, 자녀 2남 3녀

태조 왕건은 부인이 29명이나 됐고, 자녀는 25남 9녀를 두었다. 신혜왕후 유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인 오씨로부터 첫아들을 얻었고 그가 바로 혜종(惠宗)이다.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씨를 만났다. 이때 왕건은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오씨가 이것을 즉시 흡수하여 임신을 하였다. 열 달 후 아이를 낳았더니 이상하게도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혜종의 왕위 승계를 반대하던 무리들이 고의로 퍼뜨린 이야기겠지만 이런 출생담으로 인해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짧은 재위기간 동안 주름살 펼 날 없이 지냈다. 왕권이 위축되어 침실을 옮겨가며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혜종의 죽음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서경천도 계획 제3대 정종 (923~949)
재위기간 : 945. 9~949. 3 (3년 6개월) 부인 3명, 자녀 1남 1녀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혜종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서경파의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이가 제3대 왕 정종(定宗)이다. 태조 왕건의 3남(태자 태가 그의 형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었음)이었지만 강력한 호족세력인 충주 유씨가 그의 외가였기에 가능했다. 너무 많은 피를 보고 즉위한 정종은 향수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서경 천도를 계획했던 그가 죽자 백성들은 부역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환호했다고 한다.

과감한 개혁과 호족들의 수난 제4대 광종 (925~975)
재위기간 : 949. 3~975. 5 (26년 2개월) 부인 2명, 자녀 2남 3녀

태조의 4남이었던 광종(光宗)은 26년 2개월 동안 재위하면서 과감한 개혁작업을 했다. 즉위 이후 7년간 모색기를 가지다 이후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을 숙청하였다. 그는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하였고, 후주 세종의 신하 쌍기를 끌어들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도입했다. 광종의 개혁정책은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재위 26년 2개월 만인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천추태후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과 화합정책 제5대 경종 (955~981)
재위기간 : 975. 5~981. 7 (6년 2개월) 부인 5명, 자녀 1남

광종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하는 호족들이 생겨났고, 그 때문에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군이 역모에 휘말려 죽었다. 호족들이 광종을 제거하고 태자 주(경종)을 옹위하려 한다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경종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다행히 광종에겐 태자 이외에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광종의 공포정치가 끝날 무렵 살아남은 호족 공신은 겨우 40여 명이었다. 경종은 호족들을 달래고 화합정치를 모색하고자 복수법을 허락하였고, 이 때문에 곳곳에서 복수전이 벌어졌다. 복수전은 약 1년간 지속됐는데, 복수법을 빌미로 왕실의 어른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경종은 곧 복수법을 금하였다. 경종은 전시과(田柴科)를 마련하여 토지제도의 혁신적인 변환을 꾀하였고, 공신세력을 끌어안고 동시에 광종대에 성장한 신진 관료들로 하여금 그들을 견제하게 하는 양면책을 구사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왕권강화책을 시도하던 경종은 쫓겨났던 최지몽을 등용하였다. 최지몽은 조정의 실세로 등장한 후 왕승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여 경종으로 하여금 집권 후 처음으로 역모사건을 경험케 한다. 최지몽이 왕승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는 것은 호족들이 다시금 왕권에 도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이후 정치에 염증을 느낀 경종은 정사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는 등 방만한 생활로 일관하다 재위 기간 6년 2개월, 27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경종은 부인을 5명 뒀는데 제3비인 헌애왕후 황보씨는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대종의 딸이며 후에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불렀다.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는 친동생이기도 하다.

유학정치이념의 실현자 제6대 성종 (960~997)
재위기간 : 981. 7 ~997. 10 (16년 3개월) 부인 3명, 자녀 2녀

981년 7월 죽음이 임박해진 경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6대 왕에 오른 이가 성종(成宗)이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성종은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7남 대종 욱(旭)과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생 선의왕후 유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둘째 아들인 치(治)가 황제로 즉위한 까닭은 맏아들인 효덕태자가 광종의 사위인 동시에 경종과는 사촌 겸 처남매부 사이였기 때문이었고,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사이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목종이 겨우 두 살이었기 때문이다.

광종 이후 형성된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성종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즉위와 동시에 팔관회를 폐지하는 등 숭유억불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를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3성 6부제 즉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과 이, 병, 호, 형, 예, 공부 등의 6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행정조직 개편에 의한 중앙집권화를 완성한다.

유학의 진흥과 교육개혁을 통한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는 동안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며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고려 조정은 신라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승계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며 군사적 대응을 결정한다. 이에 거란은 성종 13년(993년 10월)에 소손녕을 대장군으로 삼아 침략한다.

성종은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에 임명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진을 쳤다. 서희는 광종 11년 18세로 갑과에 급제한 후 십여 년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단절되었던 송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면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았다. 소손녕은 80만 거란군이 도착했음을 알리며 힘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항복하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넘겨주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성종 역시 이 의견을 받아들여 서경 창고에 있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라고 명했다. 그런 다음에도 쌀이 남자 적의 군용으로 쓰일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했다. 이에 서희가 대세를 따르지 않고 강력하게 반대를 하자 쌀을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령은 거둬졌다.

항복을 종용하는 서한에 대해 고려가 답변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안융진을 공격했던 거란군이 패하자 소손녕은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항복을 종용하는 서한을 보내 고려에 면대를 요청해왔다. 적진으로 간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6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변까지 확대되고 고려와 거진 사이에 있던 여진의 세력은 더욱 위축이 된다.

성종대엔 행정조직의 정비를 통한 중앙집권체제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정착시켜 교육제도의 변혁을 꾀했으며, 거란과의 외교적 성과로 강동 6주를 얻어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22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고려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노력했던 성종은 997년 10월 병이 위독해지자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아들인 자신의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향수는 38세요, 재위기간은 16년 3개월이었다.

나약한 동성연애자 제7대 목종 (980~1009)
재위기간 : 997. 10~1009. 2 (11년 4개월) 부인 1명, 자녀 없음

아들이 없던 성종은 경종의 맏아들이었던 송(訟)을 궁궐에서 양육하여 990년에 개령군에 봉했다. 임종을 앞둔 성종의 내선으로 왕위에 오르니 제7대 왕 목종(穆宗)이다. 18세의 어린 목종이 집권하자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친모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차지한 헌애왕후는 귀양가 있던 자신의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이 권력을 독점하자 목종은 그를 내쫓으려고 하지만 헌애왕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왕권을 완전히 빼앗긴 목종은 절망한 나머지 정사를 소홀히 하고 엉뚱하게도 유행간이라는 인물과 동성연애를 즐기기 시작한다. 왕을 조정하게 된 유행간은 오만방자한 행동을 일삼았고, 신하들은 그를 왕처럼 떠받들었다.

겁이 많던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자에 책봉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자신의 이종 조카인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임종이 가까웠음을 안 목종은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정하고자 하였다. 목종은 대량원군을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강조는 왕의 명령이 헌애왕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려고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강조는 서경을 떠날 때 목종은 이미 김치양 일파에 의해 살해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도 평주에 도작해서야 왕이 살았다는 것을 알고 후회했지만 군사를 이끌고 와 반역으로 몰릴 것을 염려하여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한다.

병사들이 궁 안으로 밀려들자 목종은 법왕사로 피했다. 강조는 뒷일을 염려하여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강조의 수하들이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목종은 결국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1009년 2월에 일어난 강조의 역모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2.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제8대 현종 (992~1031)
재위기간 : 1009. 2 ~1031. 5 (22년 3개월) 부인 13명, 자녀 5남 8녀

경종 이후 고려왕실은 왕위를 승계할 왕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왕족 중에 근친을 통해 아들을 낳은 사람은 안종 왕욱뿐이었다. 그의 아들 왕순은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와의 불륜관계에서 태어났다. 왕순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 왕욱의 딸이며, 아버지 안종 욱은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안종은 헌정왕후의 삼촌이 된다. 그리고 헌정왕후는 성종과 남매지간이며 헌애왕후(천추태후)의 동생이기도 하다.

왕위를 노리던 헌애왕후는 누차에 걸쳐 왕순의 목숨을 노렸지만 다행히 살아남아 강조에 의해 제8대 현종(顯宗)이 된다. 하지만 현종은 즉위 초부터 거란이 목종의 폐위를 구실로 침략했기 때문에 전란에 휘말렸다. 주변국과의 잇따른 전쟁을 겪으면서 고려는 국방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된다.

993년 80만 대군으로 제1차 침입을 시도하다 서희와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난 거란은 1010년과 1018년에 2, 3차 침입을 강행한다. 1010년 10월 거란왕은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로 진군했다. 통주에 주둔하던 강조는 병력을 이끌고 응전하였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거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고려는 반격을 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현종은 나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고려군과의 전면전에서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고려군의 게릴라식 공략으로 거란군은 퇴각하였다.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강동의 여섯 성을 요구하며 침략을 하던 중 1018년 12월 소배압(소손년의 형)이 10만을 이끌고 침략을 감행했다. 강감찬이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압박을 가해오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소배압은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에 의해 구주에서 몰살당하고 말았다. 1019년 2월 초하룻날 벌어진 이 전투가 유명한 구주(龜州)대첩이다.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전란중에 소실된 사초를 복원하기 위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는 한편, 6천여 권의 대장경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때 편찬된 실록이 고려 최초의 실록이며, 이때 편찬된 대장경이 후에 원나라 침입중에 만들어지는 팔만대장경의 모태가 된다. '칠대실록' 편찬 이후 고려는 각 왕대마다 실록을 편찬하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현종은 비록 많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발전시켜 고려의 위상을 대외에 과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너무 많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재위 22년 만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현종은 차례로 왕위에 오르는 세 아들(제9대 덕종, 제10대 정종, 제11대 문종) 시대의 안정과 평화를 다지며 고려의 황금기를 여는 디딤돌이 되었다.

3. 정사(政事)와 정사(情事)를 주무른 여인 - 역사 속 천추태후 (964~1029)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대종 욱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 태어난 선의왕후다. 어머니 성인 유씨를 따르지 않고 황보씨 성을 따른 것은 친할머니 신정왕후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은 헌애왕후 친동생 헌정왕후도 왕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두 자매를 왕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황주 황보씨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말해준다.

헌애왕후는 997년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한다. 이때 그녀는 천추전에 거처하였으며 스스로를 천추태후라고 부르기도 했다. 섭정을 하던 헌애왕후는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은 성종대에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발각되어 귀양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김치양과는 버젓이 부부행세를 하며 간통을 하고 아이까지 출산한다. 이 아들로 하여금 목종의 대를 잇게 하려고 했다. 헌애왕후는 대량원군(현종)을 죽이기 위해 몇 번이나 자객을 보내고 독살을 계획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다가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헌애왕후의 인척들을 귀양보낼 때 그녀도 황주로 내쫓긴다. 그곳에서 21년간 머물다가 1029년 숭덕궁에서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4. 헌정왕후 황보씨 (?~992)와 안종 욱 (?~997)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는 헌애왕후 황보씨의 친동생이다. 왕비로 책봉된 후 후사가 없었으며 경종이 죽은 다음에는 사가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가는 왕륜사 남쪽에 있었는데 그 근처에 신성왕후 김씨 소생인 왕욱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왕래를 하였고, 마침내 정을 통하여 임신을 하였다. 이 사실은 한동안 집안에서 비밀에 부쳐지다가 발각되어 성종은 안종 욱을 귀양보냈으며, 그가 귀양가던 날에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죽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왕순이다.

비록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지만, 왕순은 태조의 손자이자 성종 자신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 아이가 두 살이 되자 아버지를 찾으므로 성종은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 왕욱이 병으로 죽자 고아가 된 왕순은 개경으로 돌아온다. 자식이 없던 목종은 그를 대량원군에 봉했다. 그러나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음모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다 목종을 폐위한 강조에 의하여 고려 제8대 현종이 된다.

짜집기를 마치며

닥치고 보자

고려 시대 왕실의 근친혼을 보고 족보가 어떻다며 따지지 말자. 근친혼은 신라 왕족의 풍습이었고, 고려 왕조를 세우며 왕권을 위협하는 호족들과 공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역사 속 왕건의 부인이 29명이 있었고 그 후손들은 촌수를 따지기에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태조가 자식들을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왕이 족외혼을 했을 경우 왕권이 외척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족내혼은 순수 혈통으로 왕위를 잇는다는 의미 이외에도 왕의 위상이 격상되었음을 상징한다. 태조가 혜종이나 정종의 배필을 자신의 딸들 중에서 택하지 못했던 것은 왕권이 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이 될 가능성이 컸던 혜종과 정종의 결혼은 호족들과의 제휴를 위하여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떠들지 말자

강감찬과 함께 천추태후는 거란의 대군을 물리친다고 하지만 제1차 침입은 성종 시절에 있었고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으며 끝난다. 이어지는 두 차례의 침입은 천추태후가 귀양가 있던 현종 때 일어난 일이다.

또한 헌정왕후 황보씨는 경종이 죽은 후 사가에서 안종 욱을 만나 정분을 쌓고 현종을 낳게 된다. 경종에게 시집가기 전에 안종 욱과 눈이 맞았을 확률이 낮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보자.

사극 〈천추태후〉가 역사적 사실과 같네 다르네 떠들지 말자. "이 글은 소설이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핏대를 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테레비에 나오는 것 중에 사실인 것은 딱 세 가지뿐이다. 동물의 왕국, 스포츠 중계 그리고 전쟁. 이 세 가지 빼고는 모두 픽션이다.

그저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에 감탄하며 재미있게 닥본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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