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마 한국경제

쾌도난마 한국경제
  • 우리가 그 나쁜 재벌 체제에 매우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보수'적인 사람들인데, 또 난데없이 노조 편을 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조금은 '진보'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정부 개입을 적극 옹호하는 것을 보면 박정희를 찬양하는 '수구'임에 틀림없는데, 또 자본 시장 자유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것을 보면 '극좌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싶기도 한, 뭐라 딱 규정하기 힘든 입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4)
  •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의 지배층과 실패한 나라의 지배층 간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바로 착취로 빨아들인 부를 어디에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승만 체제와 박정희 체제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민중들로부터 수탈한 부를 흐리멍텅하게 낭비해 버렸다는 겁니다. 남미도 마찬가지고요. 그에 비해 박정희 시대의 국가는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해 수탈한 부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투자하도록 강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53)
  • 박정희 체제의 특징을 첫째,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둘째, 자유주의도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 그러니까 박정희가 경제 발전에 성공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나라를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핀란드의 경험을 연구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고요. (81)
  • 재벌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예요. 시장주의(자유주의)를 들여오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990년대 중반 자유기업원 등을 만들어 미국 공화당 극우파들의 극단적 개인주의나 수입하고, 주주 자본주의 이론 들여오고 그랬거든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거죠. 자유주의를 수입해서 '정부는 기업에 간섭하지 말라'고 해 놓고 보니, 그 논리대로 하면 그룹의 전체 주식 중 극소수만 보유했을 뿐인데도 그룹 전체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재벌 가문이야말로 대다수 주주들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있는 셈이거든요. (83)
  • 미국에서 주주 자본주의와 소액주주 운동이 강화된 게 1980년대부터인데, 그 이후 기업의 배당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처음에는 전문 경영인을 감시하기 위해 소액주주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보면 미국 최고경영자들의 봉급이 엄청나게 올랐다는 겁니다. (...) 결국 주주들과 경영자들이 짜고 노동자를 벗겨 먹는 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134)
  •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강자만이 살아남는 체제이자 저성장 체제다. 오늘날 우리 경제의 양극화는 거기서 배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주주 자본주의는 가진 자를 위한 것이다. 주주와 경영자들이 야합해 노동자들을 등치는 체제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런 신자유주의와 주주 자본주의에 대해 개혁 세력들이 열광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에서 기인한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141)
  • 심지어는 숙련 노동자들의 질에 따라 그 나라의 국가 경쟁력이 결정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산업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선진국과 후진국의 가장 큰 차이는 노동자의 질(質)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왜 벤츠 같은 자동차를 못 만들겠어요? 다 기계로 하는 건데... 그 이유가 바로 벤츠를 만드는 기계에 체화될 수 없는 종업원들의 '암묵적 지식' 때문이란 말입니다. (161)
  • 영국에서 우리가 정말 얻어야 할 교훈은, 공기업 민영화를 했더니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얻으려 할 뿐 설비 투자는 기피하는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더라는 거예요. 하지만 공기업이 뭡니까? 시민들의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서비스, 즉 교통, 에너지, 물, 통신 들을 책임지는 업체 아닙니까? 때문에 공기업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공공성이고요. 그런데 공기업들이 민영화되어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주주 자본주의 원리에 매몰되면서 공공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서민층이고요. (167)
  • 재벌을 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재벌이 주적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노동 운동가들은 마치 재벌을 해체하고 계열사들을 독립 기업화시키면 그 독립 기업의 전문 경영자들이 노사 관계를 더욱 민주화시킬 거라고 은연중에 가정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단언하건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 경영진이 등장했다는 것은 기업에 대한 주주의 압력이 훨씬 더 강해진다는 이야기이고, 또 이 주주들은 재벌 기업이든 독립 기업이든 상관없이 정리 해고를 하고, 비정규직을 채용하면 박수를 치며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분들이란 말입니다. 이분들이 인간적으로 악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결국은 이익을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거죠. (178)
  • 사실 노무현 정부는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는 진보적 냄새가 나는데, 경제·사회적 부문에서는 오히려 보수 우파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어요. 앞뒤가 안 맞는 셈이죠. (197)
  • 우리나라 시민 단체들은 간혹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한다고 느껴지는데, 한편에서는 '관치 경제 중지하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복지 강화'를 외치거든요. 사회복지를 강화하다 보면 국가 혹은 관료의 역할이 커지게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221)
  •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동반하며 양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는 자유 민주주의자들(liberal democrats)의 신조와는 달리, 양자는 서로 분리되며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장하준 박사와 나의 주장은 명확하다. 박정희 체제가 경제 발전에 성공한 이유는 독재(즉 반민주주의)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자유주의적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긍정하는 점은 그 비자유주의적 측면이지, 반민주주의적 측면이 아니다. (236)

쾌도난마 한국경제/장하준·정승일의 대화를 이종태가 엮음/부키 20050718 240쪽 9,800원

옹졸하게 갇힌 주관이 어렵지 않게 풀어가는 대화를 들으며 이해의 폭을 확장하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일시되는 교육을 받은 과거의 때가 아직도 벗겨지지 않았음을 절감한다.

화자들이 밝혔듯이 이분법적인 사상의 관념을 넘나드는 흑묘백묘론은 2004년 5월에 시작해서 그 후 일 년이 지나서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지난 정부 시절에 한 좌담이지만 지금도 무릎을 치며 곱씹게 만드는 대목이 여러 군데에서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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