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1. 조선이 아니라 한국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라는 말로 인해 한국문화는 고조선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는 생각을 너무나 쉽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단절에 의해 발전되어왔다. (14)

2.
조선과 결별한 후 한국이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를 향해 전진해온 것은 사실이다. 몇단계로 나누어 고찰해보자. 각 단계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즉 생존-생활-행복-의미가 될 것이다. (34)

3. 생존의 시대 : 각자 알아서 요령껏
조선의 몰락부터 1961년의 꾸데따까지를 생존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생존을 위해 집단이 더 유용한지 각자가 알아서 사는 것이 더 유용한지는 당시의 상황에서 판단할 일이다.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각자 알아서 요령껏 사는 것이 가장 유용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35)

4. 생활의 시대 : 역동성과 경쟁사회의 도래
이 시기는 꾸데따 이후 문민정부 이전까지를 말하는데, 산업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기 시작한 시기이다. (...)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생활을 맛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군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37)

5. 행복의 시대 : 경제적 지위와 정치적 권리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어느정도의 사유재산이 생기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재산이 없을 때에는 정치적 자유나 인권보다는 생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 여가를 즐길 만한 경제적 지위는 정치적 권리도 요구하지만 동시에 행복에 대한 열망도 불러온다. (40)

6. 의미의 시대 : '~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
노무현정부가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 중에 한국의 의미추구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즉 행복을 넘어서 인생의 의미를 탐색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42)

7.
나는 한국의 문화는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46)

8. "지금 이 세상이 전부이다" 현세주의
왜 꼭 32평 아파트로 가야만 하고 일류대학을 나와야만 하는가? 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가만히 앉아 명상에 잠기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현세주의의 장점은 현실에 나름 합리적으로 대처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해지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73)

9. "감각의 즐거움을 좇는다" 인생주의
인생주의는 제도보다 감정을 중시함과 동시에 사회적 성공보다는 삶의 쾌락을 더 중히 여긴다. (85)

10.
한국인은 기록을 잘 남기지 않는다. 기록으로 화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는 분석도 있다. 나는 그보다는 한국인은 기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인생이고, 인생에세도 자신이 즐거우면 그만인 순간들이라면 굳이 기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어차피 죽으면 남는 것은 없는데, 죽음과 함께 기억은 사라질 것이고, 기억을 기록한 것이 남는다고 해도 어차피 자신의 기억은 아닌 것인데, 기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블로그는 자신의 기록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블로그를 통해 인생의 즐거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즉 필요하기 때문에 블로그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100)

11. "공수래공수거, 좌절할 필요 없다" 허무주의
한국의 허무주의는 수동적 혹은 능동적인 허무주의가 아니라 보험용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적극적인 주장이나 주의가 아니라 현세주의와 인생주의를 보완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뿐이고 한번뿐인 이 세상을 즐겁게 살기 위해 드는 일종의 보험과 같은 것이다. (...) 한국의 허무주의는 생이 힘들고 고단할 때 쉬어가는 곳이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믿음은 실패와 좌절을 맛볼 때 보험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 인생은 원래 이런 거야. 사실은 허무한 것이지.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다시 시작하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106)

12. "좋음을 추구하는 삶" 실용주의
한국은 지난 1세기 동안 실용주의를 철학으로 택해왔다. 즉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어떻게'라는 문제에서는 실용주의를 취했다는 것이다. 하나뿐인 이 세상, 한번뿐인 이 세상, 즐겁게 사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택한다. 이런 정신이 실용주의다. (126)

13.
좋음은 진, 선, 미의 상위개념이다. 진리, 선함, 아름다움은 각각의 가치를 갖고 있지만 이 모두를 아우르는 상위개념은 좋음이다. (136)

14.
개혁이나 보수는 겉으로는 거창한 문제로 보이지만 대중에게는 개혁과 보수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혁신 논쟁이 치열하고 진지해 보이지만 대중은 한 가지 기준으로 본질을 직시한다. 인생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에 맞는 선택지를 택한다는 것이다. 진보의 물결이 필요한 때라면 진보를 택하고, 보수가 필요한 시기에는 보수를 택한다. (...)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하면 지나치지만 지식인사회 그리고 언론에서 논의되는 진지함을 대중도 공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41)

15.
이명박정부의 실용주의는 사이비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말만 실용주의를 내세우고 실제로는 무엇이 실용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효율이나 경제성이 높은 것을 실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천박한 실용주의로 불러도 되겠다. (149)

16. 유연하고 역동적인 한국적 실용주의를 위하여
나는 실용주의가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는 구조를 갖고 있기에 유연성과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점이고, 둘째는 삶에서 도출된 생활철학이기에 힘이 있다는 것이다. (171)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탁석산/창비 20081110 262쪽 12,000원

'문화는 단절에 의해 발전되어왔다'는 뜻밖의 단정으로 시작한다.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가 흐르는 현대 한국인은 좋은 삶을 위해 문화를 창조하고, 언제나 실용적인 선택을 한다. 맞는 말이다. 엊그제 어떤 바보를 떠나보내며 슬퍼하고 분노하다가 싱글벙글쇼를 들으며 낄낄거리고 있으니.

우리는 지혜로운 개똥철학자인데 왜 이 시대는 후퇴한 것처럼 보일까? 여기에 대한 뾰족한 답을 들을 수는 없다. 간혹 승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다. 지금이 잊고 있던 이들에게는 혹독한 보충수업시간이고,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소중한 역사체험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오늘 존재하는 이들은 조선을 지나 한국을 넘어 대한민주공화국 출발을 알리는 단절의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미를 곱씹으며 진정한 의미를 찾아 떠나는 출발점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서게 한 지금이 단절의 출발이라고 회상하는 시절이 오리라 믿는다.

조급하게 생각지도 말자. 우리는 이제 겨우 인생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문화는 과거와 단절하며 발전한다. 꾸데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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