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변천사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경영이념으로 내세운 아무개 회사는 고객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했습니다. 순식간에 변하는 물리적 처방이 아니라 은근히 근본을 변하게 하는 화학적 처방을 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지요. 지금까지도 결재 칸 최상위를 고객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90년대 초반에는 엄연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객이란 내 일의 결과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때 배워서 아직도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고객에 대한 정의입니다. 처음 접했을 때는 단순히 후공정에 있는 사람이나 업무를 고객으로 인식하고 있었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조금 더 살을 붙였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회사에서 제일 끗발 있는 부서는 금고 열쇠를 쥐고 있는 관리팀이나 경리과 일 겁니다. 세금계산서 하나 처리해 주는 데 말단이 가면 안 된다고 하면서, 높은 분이 전화하면 굽실거리며 처리하는 경우가 있죠. 고객에 대한 정의로 잣대를 대면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가 아니라 고객을 죽이는 가치창조에 가까울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 더 배웠습니다. 끗발 좋은 계급장을 달고 있다고 사람까지 끗발이 좋은 거 아니라는 걸요. 한마디로 말하면 영원한 갑은 없다는 거죠. 이 사실을 늦게 깨우칠수록 고객들은 울화통이 터지며 살게 됩니다.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딱 한 권만 추천하라면 저는 주저 없이 《좋은 회사 존경받는 기업인》을 꼽습니다. 회사를 창업하려는 분이라면 썩 괜찮은 초심을 갖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좋은 구절들이 많은데 저는 이 구절을 대하는 순간, 바로 이것이 고객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왜 회사 일이 헌신적일 수 있는가는 바로 회사일이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할 수 있게끔 해 주었기 때문이다.

리노 식품(RHINO FOODS)을 소개하면서 나온 구절입니다. 저는 회사라는 말 대신에 고객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고객은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게 해준다.

표절했지만 고객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사람이나 업무에 한정돼 있던 개념에서 존재 이유로 확장이 된 셈이죠. 내 일의 결과를 사용하는 사람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게 해준다는 정도 되겠죠. 그렇다고 제가 고객 전도사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고객을 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고객에 대한 정의가 바탕에 흐르고 있고, 그래서 더욱 분발하라는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새로 생긴 고객에 대한 관심사는 애플입니다. 아이폰 열풍과 달리 서비스는 아주 형편없는 낙제점인데도 왜 그렇게 열광하고 있을까 하는 겁니다. 공짜로 주는 범퍼를 받으려면 서비스 센터를 두 번이나 방문해야 합니다. 국내 기업체가 그랬다면 승용차로 들이받는 돌진남이 서너 명은 나왔을 텐데 말이죠. 아이폰을 쓰는 고객들은 욕은 하지만 군소리 없이 발걸음을 팔고 있는 게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런 고객을 충성고객 혹은 애플빠로 부르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뭔가 새로운 고객이 출현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새 스토리 얘기를 많이 하죠. 스토리가 없으면 말짱 꽝인 시대죠. 남이섬을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이유가 겨울연가라는 스토리가 있는 것처럼요.

아이폰과 맥북에어에 열광하고, 잡스가 뭘 발표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슈가 되고 있죠.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긴 줄을 서는 생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고객을 딱 한마디로 부를 만한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더 명쾌하고 핵심을 집어 줄 마땅한 이름이 생길 때까지는 당분간 스토리와 문화를 먹는 고객이라고 부르렵니다. 저도 스토리와 문화를 먹기 시작했거든요.

삼천포로 빠지는 얘기지만 사족을 하나 붙인다면 정치인은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해주는 세상이 어여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먼저 상호 고객이 되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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