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스펙이 아니라 실수야

1.
신입사원 시절. 보수용으로 쓸 배관 자재를 주문하였습니다. 며칠 지나 자재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나가보니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죠. 트럭 한가득 배관재가 실려 있더군요. 어라, 내가 주문한 게 아닌데 하며 납품증을 확인해보니 천인공노할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애당초 작업에 쓸 배관은 60미터가 필요했습니다. 주문한 배관은 360미터가 도착했던 겁니다. 보통 배관재는 1본이 6미터입니다. 60미터가 필요하면 10본으로 주문을 넣어야 하는데 단위를 확인하지 않고 60으로 써넣었던 거지요. 더군다나 스뎅이라고 불리는 sus 계열이었으니 일반 배관재보다 그 값이 서너 곱절은 됐으니까요.

순간 눈앞이 막막했지만 어쩝니까. 대굴빡을 급하게 굴렸죠. 현장 작업반장에게 6본만 남기고 나머지는 공장 외곽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순탄하게 작업은 마무리됐지만 짱박은 자재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후속작업에 그 배관이 필요하게 되어 보스에게 이실직고했습니다. 여차여차해서 자재가 있으니 그걸 쓰겠다고요. 보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하라며 넘어갔습니다. 그제야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었답니다.

그 후로 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맞습니다. 단위(specification)가 무엇인지 두세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교정작업을 하는 편집자 눈에 맞춤법이 젤 먼저 띄는 것처럼 말이죠. 신입사원 시절에 저지른 실수가 어디 이것뿐이겠어요. 온갖 실수를 저지르는 기간이 신입사원 시절이고,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어지간하면 다 용서가 되는 시절이 바로 그 시절입니다.

그렇게 삼 년 동안 좌충우돌 했던 경험을 열 번 정도 써먹다 보면 삼십 년이 흐르고 은퇴를 하지요. 물론 똑같이 써먹으면 은퇴 시기가 빨라지니까 실수도 줄이고, 튜닝도 하고, 가끔은 새로운 걸 선보여야 하겠죠.

2.
오늘이 수능시험 날이죠. 고생은 했지만, 어디 수험생 혼자만 고생을 했겠어요. 같이 시험 본 동기들도 똑같이 고생했고, 간식 챙겨주신 어머니들도 고생하셨죠.

요즘은 열에 여덟이 대학을 진학한다고 하데요. 소위 말하는 일류대도 있을 것이고, 생전 처음 듣는 대학도 있는 걸 봐서는 솔직히 학력 인플레이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접겠습니다. 다만, 오늘 시험을 보신 분들은 대학에 진학해서 스펙 쌓는데 열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막걸리 집에 모여 개똥철학을 얘기하고, 꼰대 같은 기성세대를 맘껏 욕하시기 바랍니다.

대학은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 성취했어도 성공한 대학생활입니다. 학점(Spec), 사랑(Love), 동아리(Circle). 스펙은 그 셋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랑과 동아리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낄 때가 올 겁니다.

대학생활은 이제 인생의 신입사원이 됐다는 발령장입니다. 실수를 많이 하세요. 스펙이 아니라 실수와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경험의 황금시기이자 실수의 면피시대가 대학 입학식날부터 첫 월급 받기 직전까지니까요.

이상은 인생의 신입사원 시절을 어영부영 보낸 사람의 지청구였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