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 이동순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달리던 노루는 찬 기슭에 무릎을 꺽고
날새는 떨어져 그의 잠을 햇살에 말리운다
지렁이도 물 속에 녹아 떠내려가고
사람은 죽어서 바람 끝에 흩어지나니
아 얼마나 기다림에 설레이던 푸른 날들을
노루 날새 지렁이 사람들은 저 혼자 살다 가고
그의 꿈은 지금쯤 어느 풀잎에 가까이 닿아
가쁜 숨 가만히 쉬어가고 있을까
이 아침에 지어먹는 한 그릇 미음죽도
허공에 떠돌던 넋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리라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성난 목소리도 나직이 불러보던 이름들도
언젠가는 죽어서 땅위엣것을 더욱 번성하게 한다
대자연에 두 발 딛고 밝은 지구를 걸어가며
죽음 곧 새로 태어남이란 귀한 진리를 얻었으니
하늘 아래 이 한 몸 더 바랄 게 무어 있으랴

개밥풀/이동순/창작과비평사 19960430 120쪽 3,500원

내 삶은 누구의 죽음을 먹고 사는데 그 값도 못하고 있다. 그저 시간만 삼키다 보니 점점 어린 것들 볼 낯이 없다. 귀한 진리가 내게서 끝날지 모르는 죄책감이 드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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