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 대한민국을 비웃다

가위바위보는 중국 양권마라는 놀이가 일본 에도시대에 가고시마로 전해졌고, 발음이 '장껭뽕'으로 굳어지며 놀이 양식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 장껭뽕이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전해져 가위바위보 형태로 바뀌고 놀이가 되었다네요.

가위바위보는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라서 절대 강자 없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니 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로 심판을 두지 않아도 명명백백하게 승부가 가려져 꼼수를 써서 상대방의 눈을 속이려는 비겁한 행동도 하지 못하죠. 가위바위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간편하고 공평하게 승부를 낼 수 있는 놀이 가운데 으뜸이 아닐까 합니다.

가위바위보는 민주주의 역사다

가위바위보는 민주주의와 닮았습니다. 알다시피 민주주의 기본 원리는 삼권분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삼권분립 보편화에 대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회에 입법권을, 행정권은 정부,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가 권력을 세 기관으로 나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룸으로써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라는 뜻이겠죠.

불행하게도 우리는 삼권분립이 그저 책에나 쓰여있는 먼 나라 이야기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라 부르며 주먹이 언제나 승리하는 기이한 가위바위보 놀이를 계속해 왔습니다. 승부를 내면서까지 주고받을 것도 별로 없었고,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한가하게 가위바위보를 할 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제가 압축성장하는 동안 성숙해진 시민의식은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압을 받았습니다. 행동하는 소수는 잠자려는 의식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투쟁을 했고, 덕분에 억눌리며 잠재됐던 시민의식은 일순간 폭발을 했습니다. 공정한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방방곡곡에서 봉기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무소불위를 휘두르던 주먹은 굴복하였습니다. 1987년 6월 혁명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꼼수 쓰는 걸 용납하지 않으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불과 이십오 년 전 일입니다.

우리들의 가위바위보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는 말이 수도 없이 많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로 귀결됩니다. 재벌, 대통령, 박사는 이런 속성을 아주 고급스럽게 포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인이라 부르는 이들만 겨우 이 속성에서 예외일 정도죠.

권력자는 돈을 탐하여 부정축재를 했고, 명예를 강탈하여 위정자가 됐습니다. 돈은 권력과 야합하며 정경유착을 하였고 명예를 사는 천민자본이 됐습니다. 명예는 권력에 아부하여 어용이 됐고, 돈과 결탁하여 사이비가 됐습니다. 이것이 지난 우리들의 과거였습니다.

6월 혁명 이후 돈, 권력, 명예라는 욕망도 가위바위보처럼 견제와 균형을 하도록 묵시적 합의를 했습니다. 품위 있는 공생을 실현하도록 급속한 변화를 강권했습니다. 그렇게 민주화 시대는 시작했습니다.

다시 출현한 주먹

살인마 전두환 일당이 법정에 서고, 위장전입한 장관 후보가 낙마하는 걸 지켜봤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법정에 출두하는 재벌도 있었고, 허위학력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흡족하지는 않지만 점점 가위바위보가 공정해져 갔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와 정의사회구현으로 포장됐던 암울한 시절로 냅다 역주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세대에겐 혹독한 보충수업의 기회를, 신세대에겐 불행한 역사체험의 장을 마련하며 더는 내려갈 바닥이 없게 아주 깊이깊이 삽질을 했습니다.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세금탈루라는 3종 세트는 장관이 갖출 기본 덕목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카의 거짓말을 100개로 줄여야 하는 고통이 더 컸다는 책까지 나왔습니다. 천안함 의혹에 이어 투표함 의혹까지 있습니다. 지난 정권이 저지른 패악에서 엑기스만 모아서 부활한 좀비가 주먹을 내며 놀이판을 깨트렸습니다. 우리가 내민 손을 굽어보며 가위바위보가 비웃고 있습니다. 억수로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서요.

가위바위보는 최소한의 염치

지난 4.11 총선 결과를 보며 멘붕상태에 빠졌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절묘한 선택을 했던 국민의 수준이 현저하게 낮은 국회의원의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박사 위에 복사라는 새로운 학위가 생겼고, 패륜적인 성추행범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친일파를 뿌리로 둔 개차반 같은 정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기 치고 윽박지르다 못해 몰래 뒷조사까지 해서 겁박하는 BH 좀비랑 4년을 지내다 보니 웬만한 비리엔 놀라지도 않는 내성이 생겼나 싶습니다. 우리 수준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건 오로지 가카께서 삽질한 나락에 빠져서 그렇게 됐다는 변명은 거시기 합니다.

아쉽게도 올해 우리에게 온 두 번의 기회 중 하나가 지나갔습니다. 4.11 총선을 쓸개처럼 씹으며 뼈아픈 실수를 잊지 말고 다시 한 번 투표근을 단련하렵니다. 12월에 있을 선택은 6월 혁명 이후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네 타는 좀비2로 말미암아 바닥에서 굳히기를 하면 안 되기 때문이죠. 다가오는 18대 대통령 선거일은 공교롭게도 오 년 전과 같은 12월 19일입니다. 이것은 오 년 전과 같은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라는 엄중한 계시입니다.

다음 세대가 즐겁게 가위바위보를 하는 세상을 물려주는 것. 현존하는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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