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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27)
  • 198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정치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고, 199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대중문화의 중심이었지. 지금 우리는 뭘까? 아무것도 아니야. 작은 유행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데도 반항 정신이나 독립조차 이전 세대에 못 미치지. (40)
  •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77)
  •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188)
  •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199)
  • 식당에서 키우는 개가 생각났다. 손님들마다 한 번씩 쓰다듬고 목을 만지고 지나가는데,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피곤한 개 말이다. 사람 손을 탈 대로 타서 이제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손님이 귀찮기만 하지만 손님에게 짖거나 손임을 물었다간 주인에게 맞는다. 손님이 자기 꼬리를 만지든 불알을 만지든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다. 그런 예속된 삶. 식민지 백성의 삶. (215)
  • 표백 세대의 고통은 좌절이 아닌 굴욕에서 비롯된다. 야심이 있든 없든 이 세대는 모두 굴욕을 당할 운명이며, 이에 대한 저항에는 모든 젊은이가 동참할 수 있다. (319)

표백/장강명/한겨레출판 20110722 352쪽 11,000원

《댓글부대》를 읽었다.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있을 법한 사실을 쓴 소설이 아니라 댓글이 진화하는 관찰기였다. 작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데뷔작을 찾아 읽는지라 《표백》을 펼치고 단숨에 읽었다.

모순이 해결되지도 혁명도 일어나지 않는 완성된 사회에서 식당에서 키우는 개처럼 굴욕적으로 사는 청년 세대를 작가는 '표백세대'라고 한다. 화염병을 던질 시간도 없게 하거나 대중문화를 이끌지 못하게 하려고 스펙과 도전을 강요한다. 정작 화염병을 던졌고 대중문화를 즐겼던 꼰대들이 완성된 사회를 더 견고하게 한다.

작가는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젊은이들에게는 과업을 찾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길'이라고 한다. 기울어진 판에서 벌어지는 승자 없는 싸움을 외면한 처방이다. 화염병을 들기는커녕 만들 시간조차 없는 표백세대가 멍 때릴 시간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이것은 꼰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의무다.

멍을 때려야 몽(夢)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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