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캐비닛
  • 물건과 인간이 서로 닮아 있는 미래 사회란 어떤 것일까. 22세기에는 탁자도, 꽃병도, 술잔도 인간처럼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받으며, 지독한 외로움에 떨게 된다는 말일까? 아니라면 22세기에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도 않고, 서로 미워하지도 않아서 외롭지도 상처입지도 않은 채 저 물병처럼 저 탁자처럼 그저 자기 자리에서 우두커니 살아가게 된다는 말일까. (120)
  • 그러다가 문득 혼자 저녁을 먹기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은 무모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낭비적인 행위라기보다 무모한 행위. 옛날 크로마뇽인들도 혼자 저녁식사를 하겠다고 멧돼지를 잡았을까. 당시에는 정육점이 없었으므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혼자 사는 크로마뇽인 따위는 애당초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크로마뇽인은 며칠도 못 버티고 죽어버렸을 테니까. (123)
  • 나는 죽음이 뭔지 알아요. 그것은 시간을 입금해놓은 자신의 통장에 잔고가 하나도 안 남은 상태죠. 이미 다 써버렸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차압당했거나. 별다른 건 없어요. 그저 파산한 삶을 복구할 잔고가 없는 거죠. (176)
  • 13호 캐비닛을 뒤적거리며 이토록 이상한 사람들과 섞이기 전까지 솔직히 나는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굳이 이해하지 않고도 잘 살아올 수 있었다. 나의 상식과 인간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202)
  • 종은 환경이 안정적일 때는 진화하지 않으니까요. 진화할 필요가 없으니까 진화하지 않는 거죠. 만약 도시가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 그럴 거라면 결국 인간이 변해야 하겠죠. 그건 진화의 문제가 아니라 종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니까요. (277)
  • 이상하게도 불행이 꼭 이 부비트랩과 닮아 있다. 마치 하나의 불행이 다른 불행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인계철선 하나를 건드려 터지기 시작하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든 불행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온다. (300)

캐비닛/김언수/문학동네 20061221 392쪽 12,000원

백칠십팔 일 동안 캔맥주만 마셨던 공덕근이라는 사내가 있다. 13호 캐비닛을 열기 전까지는 기이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캐비닛에는 괴물이거나 돌연변이 혹은 미친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든 분야에서 천재였던 이유는 작가의 주의사항에도 불구하고 가짜 이론처럼 보이지 않는다.

끝내 사내도 그들처럼 진화하려고 한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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