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낙태 여행

유럽 낙태 여행
  • 한국에서는 낙태가 불법이지만 병원에서 암암리에 수술을 받고 있다고 하자, 마르틴은 즉각 "위선이네"라고 내뱉었다. 이때만 해도 그저 명쾌한 촌철살인인 줄로만 알았던 이 말은, 낙태 규제법과 싸우는 여러 나라가 겪고 있는 현실을 지시하는 관용구와 같은 표현이었다. (27)
  • "프랑스에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은가"를 물었을 때 마르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없어요.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자는 있지만" (37)
  • 한국 사회의 인식은 아직 여기서 한참 멀다. 실제적 생명인 여성의 삶과 권리를 잠재적 생명의 뒤에 두는 것이 얼마만 한 폭력인지, 왜 낙태죄가 여성 인권의 취약함과 직결되는 문제인지에조차 설명이 필요하다. (46)
  • 세상은 평등하며 이제 페미니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남성들과, 세상은 평등하다고 믿었다가 살면서 경험을 통해 투쟁이 결코 끝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여성들 사이의 인식 차는 한국 여성들에게 이미 익숙한 주제다. 아들린의 말대로 이것은 국가를 떠나 우리 세대가 다 함께 경험하는 문제일 것이다. (55)
  • 낙태뿐 아니라 누군가가 삶에서 하는 어떤 결정이든 누군가에게는 도덕적 비난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꼭 법적 판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낙태라는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에 의해 처벌받을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86)
  • 낙태를 할 때에는 무대에 여자만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돌연 아빠의 아이가 된다. 어쩌면 이게 여성의 낙태를 그토록 다 함께 손가락질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국가와 남성의 재산인데 그것에 해한 선택을 여성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93)
  • 자궁에 수정이 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태아의 "캐리어"가 되며 국가는 태아를 생명으로 대우하고 그 캐리어인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138)
  • 하지만 남자들이 화를 낸다는 건 우리가 뭔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죠. (162)
  • 피임과 낙태에 대한 의무교육은 존재하지 않으며 '최고의 피임은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나라. 비아그라는 처방전 없이 살 수 있지만 피임약은 살 수 없는 나라. 이것이 폴란드의 현재였다. (216)
  • 낙태죄 폐지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없애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새로 만들고, 기존의 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프랑스는 이 과정을 착실히 밟고 있는 듯하다. (236)
  • 우리는 낙태가 법으로 보장되는,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나라라 여겼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의외의 현실을 듣고, "지구상에 여성의 재생산권이 완전이 얻어진 곳은 없다"는 그들의 말을 확인했다. (246)

유럽 낙태 여행/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봄알람 20180707 252쪽 15,000원

낙태가 합법인 나라와 한국보다 규제가 더 심한 나라에서 고군분투하는 활동가들을 만났다. 낙태를 금지하려고 저지른 역사는 처참하고 잔혹했다. 서로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국가와 종교 혹은 사회와 남성이 낙태 정책으로 여성의 몸을 여전히 통제하려 한다. 낙태를 눈감아주는 '위선'을 관용으로 포장하면서 말이다.

낙태 규제법의 본보기인 프랑스와 네덜란드도 여성의 재생산권을 완전히 얻지 못했다. 임신 9개월이 됐어도 본인이 결정하면 낙태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프랑스 활동가 마리 클로드의 대답은 울림이 크다. 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운동으로 접근하라는 조언이다. 이것은 여성이 가져야 하는 첫 번째 자유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없고,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자만 있다는 말에 뜨끔했다. 낙태권 투쟁에 남자들이 화를 내는 건 당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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