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벌레

Water Bear
micropia

인류가 우주의 더 넓은 공간에서 더 항구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런 날이 온다면, 그것은 곰벌레(Waterbear), 즉 완보동물 덕분일지도 모른다. 2007년에 '우주의 완보동물'이라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제목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지구 상공의 궤도에 이 작은 동물들을 열흘 동안 놔두는 실험이었다. 그들은 섭씨 -272.8도(절대영도에 아주 가깝다)에서 섭씨 151도까지 오르내리는 온도와, 거의 완전한 진공상태에서 살아남았다.

전형적인 곰벌레는 몸집이 이 문장의 마침표만 하다. 현미경으로 보면 통통한 곰 인형과 좀 비슷한 모습이다. 곰 인형이 발톱과 붉은 눈과 두 쌍의 다리를 추가로 더 지녔다고 보면 된다. 곰벌레가 속한 완보동물문은 적어도 백악기로부터, 아니 캄브리아기부터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다른 동물 문들보다 발톱벌레 및 절지동물과 유연 관계가 깊다.

현재 지구에는 약 750종의 곰벌레가 있고, 이들은 빙하에서 온천에 이르기까지, 열대에서 극지방에 이르기까지, 해발 6,000미터를 넘는 히말라야산맥에서 수심 4,000미터를 넘는 심연의 퇴적물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 산다.

가장 나쁜 시기를 휴면 상태(tun)로 견디는 능력도 이 동물이 성공을 거둔 한 요인이다. 곰벌레는 휴면 상태에 들어갈 때에는 몸의 물을 거의 다 배출한 뒤 트레할로오스라는 비환원당으로 세포막을 단단하게 만든다. 지구에서는 이 상태로 120년을 버틸 수 있다.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마치 압축된 종이 뭉치를 물컵에 담그면 펼쳐져서 종이꽃이 되는 것처럼, 낮잠에서 깨어나서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한다.

작은 곰벌레는 거의 믿어지지 않을 만치 혹독한 조건을 견딘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398~407)

이원영 박사가 쓴 《여름에는 북극에 갑니다》를 읽고 완보동물(緩步動物)을 처음 알았습니다. 극지방에서 적도까지 분포한 생명체가 인간뿐인 줄 알았거든요. 완보동물은 지구 역사 동안 다섯 번에 걸친 대멸종 때도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현재의 지질 시대를 홀로세(Holocene)라고 하는데, 이는 가장 최근의 빙하가 끝난 뒤인 약 1만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를 말합니다. 일부 지질학자들은 지금 시대를 새로운 지질 시대인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로 공식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일어났던 변화에 버금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세는 화석 연료를 대규모로 태우기 시작한 때를 출발점으로 삼는답니다. '생명의 역사상 유례없이 한 종이 대규모 멸종과 변화를 일으키는 시대(9)'라는 거지요.

인류로 인해 6차 대멸종이 진행 중이지만 조물주는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지구에서 살아남을 최후의 생물인 곰벌레가 있으니까요.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The Book of Barely Imagined Beings: A 21st Century Bestiary, 2012/캐스파 헨더슨Caspar Henderson/이한음 역/은행나무 20150310 540쪽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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