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의사의 실수로 태어난 장애아가 '당신의 실수로 내가 태어났으니 그 손해를 배상하(96)'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이른바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입니다. 청각장애인 레즈비언 커플이 청각장애인 유전자로 임신을 했고,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한테 장애를 갖게 하다니 그러면 안 되는 거였(100)'다며 비난이 쏟아지고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잘못된 삶'이거나 '손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일을 인간으로서 실격인 상태, '잘못된 삶'의 대표 격으로 생각(260)'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14)'을 말합니다. '시각장애 여성의 남편은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지 그녀의 시각장애 자체를 사랑한 것(113)'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실격당한 자들은 살면서 권리를 발명합니다. 밥은 굶어도 되지만 장애인 화장실이 없어 하루 종일 오줌을 참아야 할 때는 '필요한 건 희망이 아니라 화장실(211)'입니다. '모두가 어디서든 편안하게 오줌을 눌 자격이 있다는 오줌권(212)'은 화장실이 급했던 경험이 있으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이동권'이라는 말은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 이후에 사용됐습니다.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발명하고, 이를 법제도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231)' 했습니다.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231)'이었습니다.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241)'입니다.

'간단한 시술로 내 장애를 고칠 수 있고 나와 같은 장애아를 출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도 거리낌 없이 그 시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가?(99)'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남자 친구를 빼앗긴 츠네오는 조제처럼 자기 다리를 자를 수 있을까? 골형성부전증을 가진 저자가 엄마에게 나를 낳기 전에 장애가 있는 걸 알았다면 낳았을 거냐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장애가 있는 걸 알았다면 낳는 걸 망설였겠(292)'다고 답합니다. '품격주의적 태도(50)'로 포장한 속물 입장에서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그이의 장애 자체를 사랑할 자신은 없습니다.

장애가 손해라는 생각은 '장애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다는 의미(137)'입니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은 장애를 문화적 다양성이자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과는 구별(137)'됩니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 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 있(139)'기 때문입니다. 수용은 '선택하기를 실천(140)'한 것입니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한히 강해져야 한다(308)'는 건 아닙니다. 결코 완전하지 못할 취약함을 수용하고 '다소 어설프지만 나약한 존재로서,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311)' 인간으로 존엄하게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존엄이란 품위와 겉모양을 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진실을 공유하며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65)'을 뜻합니다.

'품격에는 최고 품격과 저질의 품격이 있지만, 존엄에는 최고와 최저가 없(58)'습니다.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정치적 실천(312)'이 모여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이념의 중심에 오는' 존엄의 순환이 시작되면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313)'고 변론을 마칩니다.

이 변론은 '모멸감, 비하, 배제, 억압의 경험(304)'과 맞서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사계절 20180615 324쪽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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