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대리사회
  •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서 현상을 바라보고 사유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한 대리인간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10)
  •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53)
  •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그 어떤 비정함에 무뎌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 (96)
  • 노동의 관계도는 가장 간단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계약의 주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용자는 그 중간에 '대리인'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주체로서 감당해야 할 여러 책임에서 벗어난다. (172)
  • 나는 두 달 전에 쓴 원고료와 어제 한 대리운전의 품삯을 같은 날 지급받는다. 어느 편이 더 상식과 합리인지는 명확하다. 타인의 운전석이, 우리가 믿는 그 어느 합리적인 공간보다도 오히려 더 인간을 주체로서 대우한다. (206)
  • 기사와 손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기에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을 여전히 기계로 두는 이들이 있다. 그저 핸드폰에서 간단한 클릭 몇 번을 하는 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그 무엇을 타인에게 대리시키면서, 그 기계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잊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고로움을 상상하지 못한다. 쉽게 호출을 취소하기도 하고, 아니면 기계를 대하듯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발화하기도 한다. (236)
  • 나는 노동하는 한 인간으로서 밤을 걷는다. 이 거리에, 노동자가 있다. (245)

대리사회/김민섭/와이즈베리 20161128 256쪽 13,000원

전작인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읽으며 소설집이 하나 떠올랐다. 민현기의 《교수들의 행진》이다. 당시 현역 교수가 그 사회를 풍자한(?) 소설집이다. 풍자라고 했지만 소문으로만 들었던 먹물들의 민낯을 고발한 르뽀였다.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아서 놀랐다. 노동법 관련 책을 파는 서점이 노동법을 어기며 노동자를 부리는 모습이 연상됐다.

지방시가 대리기사가 되었다. 대리인간이 대리기사를 하며 대리만족하는 대리사회에서 노동자에 관한 얘기를 한다. 이 거리에, 우리 주변에, 내 옆에 노동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쳐다본 거울 속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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