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김지은 씨는 피해자가 아니다. 아동도, 장애인도 아닌 고학력자 엘리트 여성이다. 혼인 경험도 있고, 퇴사 경험도 있다. 이전 운전비서에게 성추행도 당했다. 이에 여러 번 항의한 적도 있다. 회사에서 퇴사할 만큼 결단력도 있고, 이혼할 만큼 자기주장이 또렷하며, 피해를 당하고도 가해자 옆에서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했다. 피해를 당할 때도 아니라고 거부하고 반항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자세였다고 봐야 한다. 남자에게 거부는 거부가 아니다. 부정은 긍정이다. (148)

안희정의 변호인이 1심 재판에서 김지은에게 던진 질문의 요지다. 피해자다움이 없다는 꽃뱀론이다. 검사와 판사, 변호사는 피해자 김지은에게는 16시간을 물었지만 '1심 내내 안희정에게 무언가를 묻지도 확인하지도 않은 재판부는 그의 말이 더 일관되고 진실하다고 판단했다(151)'.

2018년 3월 5일, 김지은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안희정 지사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알렸다. 3월 6일, 안희정은 사과문을 게재하고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2018년 8월 14일, 안희정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9년 2월 1일, 2심은 안희정에게 3년 6개월 유죄를 선고했고, 2019년 9월 9일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안희정은 '성 평등을 지지하는 진보적 지도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지만 (...) 자신의 권세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105)'다. 이런 위계와 위력은 피해자들을 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줄이겠다는 연설을 하며 환호받았지만, 정작 그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노동 시간에는 한계가 없었(105)'고, '노동자로서 비서로서 성실히 일했던 (...) 행동은 모두 "피해자답지 않다"는 주장의 근거(107)'로 쓰였다. 그런 세계에서 김지은은 안희정이라는 사냥꾼에게 내던진 '암묵적 제물(107)'이었다.

미투 이후 '뉴스를 보다가 '안정화'라는 단어를 보고 안희정인 줄 알고, '민주화' 단어를 보고 민주원인 줄 알고 깜짝 놀(220)'라며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선정적인 기레기질과 가해자측의 음해로 '거짓의 파급 속도는 진실보다 훨씬 빨랐다. 한 문장의 무분별한 선동을 주워 담는 데는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이 필요했다(10)'.

《김지은입니다》는 '덫을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17)'인 안희정에게서 생존한 피해자 김지은이 '성폭력 피해자들이 말하지 못했던, 감춰야만 했던 이야기'를 '피해자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 기록(316)'하고 있다. '554일간의 투쟁은 지독한 여론 선동과 조직적 음해를 견뎌낸 고통의 기록'이다.

'기록을 모두 마치면 책이 끝나듯 이 힘겨운 싸움도 끝이 나길 소망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미결이다(338)'. 감옥에 갇힌 건 가해자인데, 성폭력 피해자는 왜 또 다른 감옥에 갇히는 것인가? 가해자의 편에 서서 2차 가해를 일삼는 이들에게는 응징을, 수많은 '약자 김지은들'에게는 응원을 보낸다.

김지은입니다/김지은/봄알람 20200305 384쪽 17,000원


덧1. 20200705 23:47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돼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안희정이 모친 장례식에 가기 위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빈소는 정치권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고, 문재인 대통령, 박병석 국회의장, 민주당 이해찬 대표, 김태년 원내대표 등이 보낸 조화가 놓였다. 피해자는 대항할 수 없는 위력으로 느낄 것이다.

덧2. 20200706 13:00
법원은 세계 최대의 아동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한 손정우(24)에 대하여 미국이 요청한 범죄인 인도를 불허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동음란물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손정우에게 1심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석방했지만, 2심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날 오후 손정우는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