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
1925년 8월 21일 오후 6시경. 여자 셋이 머리를 잘랐습니다. 허정숙은 주세죽, 고명자와 함께 '결발의 신여성으로부터 단발낭자 송락머리(13)'가 됐습니다. 단발은 별다르지 않았지만, '단발한 사람이 여자이기 때문에 그만큼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견이 분분(15)'했습니다. 신문에 비꼬는 투의 시평도 실렸고, 길거리에서는 구경거리가 됐습니다.

여기저기서 이야깃거리가 된 것은 '몇천 년간 노예가 되어 오직 복종을 임무로 삼게 하고 굴욕을 인내케 함을 당한 자는 즉 피정복자인 여성이요, 그러한 횡포를 행사한 것은 남성이었(20)'기 때문입니다. '풍속이나 사상 그 모든 것은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고, '과거 시대에 있어서 정의라고 생각하고 실행하던 그것이 현재에 와서도 영구불변하게 역시 정의라고 인정되는 법은 없습니다(8)'.

신여성이지만 월급 생활자의 비애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향상과 진보로 일상 생활이 창조적이라야만 완전한 인간 생활일 것인데,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니 자기를 위하는 인격을 수양하는 창조적 노력을 하기는 고사하고 분주한 데 끌리어 상식을 늘릴만한 잡지 한 권 들칠 사이조차 없으면서도 실생활은 웬일인지 무미하고도 단조한 느낌(40)'을 주어 가련하고 앞길이 암암하다고 토로합니다.

여성은 '경제상의 독립을 얻지 못한 까닭에 이것을 말미암아 생활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남자의 노예(58)'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결국 남자보다 임금이 싼 여자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에 그칠 따름이며 아무것도 여자의 지위가 높아지거나 여자의 활동 범위가 확장되는 것(61)'이라고 진단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벌어먹는 노동계급이 되면 여자의 권리가 조금씩 신장하여 가지만, 그 대신에 또다시 여자는 직업과 가사의 두 가지 무거운 짐을 부담하고 매우 괴로운 상태(59)'가 된다는 것도 예견했습니다.

'풍속이나 사상 그 모든 것은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결코 과거 시대에 있어서 정의라고 생각하고 실행하던 그것이 현재에 와서도 영구불변하게 역시 정의라고 인정되는 법은 없습니다(8)'. 여성이 해방을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적으로 근본적 해방을 부르짖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선 그 길을 찾아 밟기를 바란다(63)'고 조언합니다. 여성 해방은 '단지 남성을 반역하는 운동으로서는 결코 승리를 얻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남성을 만들어내는 현 사회조직을 개혁하는 운동이라야만 완전한 해방이 온다는 것(45)'을 강조합니다.

단발한 허정숙(1902~1991), 주세죽(1901~1953), 고명자(1904~1950)는 '조선 공산당 여성 트로이카'로 불린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가이자 직업이 혁명이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주세죽은 여운형이 주례를 본 결혼식에서 박헌영과 함께 독일어판 '자본론' 위에 손을 얹고 결혼했습니다. 고명자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일제 말기에 친일행로를 걷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다시 사회주의 운동을 했지만 한국전쟁 중 사망하여 누군가는 빨갱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친일파로 불리고 있습니다. 허정숙은 〈동아일보〉 최초의 여성기자였고, 직접 총을 들고 싸운 독립투사였습니다.

백여 년 전 가장 급진적이었던 허정숙의 처지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발을 향한 비난은 여성혐오로, 남자의 험담패설과 질타는 맨스플레인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낙태죄 폐지는 요원하고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단발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허정숙/두루미 20200217 100쪽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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