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백무산

시인의 말 - 백무산

시가 무모해지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의 요구에 현실이 선택되거나, 시의 행위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라면, 시가 오히려 삶을 소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 낭패다 싶은 것은, 허술한 내 처신에 있다. 돌아서면 시들이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갈수록 빨리 비워지고 자기혐오의 속도도 더 빨라졌다. 나도 내 것을 좀 지니고 살아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안 된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폐허를 인양하다/백무산/창비 20150820 160쪽 8,000원

나는 왜 마르고 닳도록 관행적으로 나인가1

멈추지 않는 직선의 되풀이2

핵은 최후의 착취다
사물의 심장을 파먹는 짐승이다3

배가 다 기운 뒤에도 기다려야 하는 명령이 있다
목까지 물이 차올라도 기다려야 하는 명령이 있다
모든 운항 규정은 이윤의 지시에 따르라4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재자는 이제 권좌에 있지 않고 독재를 찬양하는 기술에 있다 모든 독재자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 진보주의자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기술은 첨단산업처럼 눈부시다5

위장된 땅에 주저주저하다 퍼렇게 병든 씨앗이여, 시여6

정규직 노예가 되고 싶다 비정규직 노예를 철폐하라
불안정 노예를 정규 노예화하라고 외쳐야 한다

인간에게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7

선거에서 정의가 승리하고 만세를 부르고
노동자는 철탑에 올랐다
선거에서 국민이 승리하고 카퍼레이드를 하고
노동자는 송전탑에 올랐다
선거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고 정권 교체를 하고
노동자는 굴뚝에 올랐다8

어제 소모한 자질구레한 나의 분노는
어디서 삶을 빼앗긴 누군가
짓밟혀 내지르지도 못한 분노는 아닐까9

고난의 행군 끝에 민주화 완성했다 말하지 마시게10


여전히 최저시급은 만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노동자는 철탑 위에서 시위한다. 촛불은 혁명이었고, 2020년 총선은 대변혁이었지만 세상은 혁명적이지도 변혁적이지도 않다. 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은 시인의 시 한 구절이라도 내 핏줄에 흐르게 하고 싶다.


  1. 변신
  2. 광활한 폐소
  3. 세월호 최후의 선장
  4. 인양
  5. 자유낙하
  6.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겠으나
  7. 대지의 인간
  8. 세계화, 내 것일까
  9. 난해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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