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민주주의

앞으로도 우리의 입은 진보를 외칠 것이고
발은 지폐가 깔린 안전한 길을 골라 걸을 것이다.
촛불의 열매를 챙긴 소수 민주주의적 엘리트들 역시
노동대중을 벌레처럼 털어내며 더욱 창대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의회공화국이며
모든 권력도 국민이 아니라 자본과
소수 좌우 엘리트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심지 없는 촛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기득권자들을 위해 적당하게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난 촛불이 타오를수록 더욱 슬프다.
- 이산하, 「촛불은 갇혀 있다」 부분

1960년생인 이산하는 1979년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학생 운동과 필화사건으로 1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지하신문 제작·배포 등의 혐의로 일찌감치 수배된 그는 도피생활 4년째이던 1987년 3월에 제주도 4·3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녹두서평』 창간호에 발표한다. 이 일로 지명수배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며, 아들의 구속에 충격받은 이산하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한라산」은 김지하의 「오적」 이후 최대의 필화사건으로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한국에 직접 찾아와 정권에 항의하며 이산하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 이산하, 《악의 평범성》, 창비, 2021년, 129쪽


이산하 시인은 광화문 광장에 타올랐던 촛불은 기껏 나무를 골라 옮겨 심었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독재의 무기인 칼은 몸을 베고, 자본의 무기인 돈은 정신을 베고 있다며 우리는 몸도 베였고 정신도 베여서 이것밖에 안 된다고 진단했다. 촛불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미해서 자본과 촛불의 열매를 챙긴 소수 좌우엘리트들이 권력을 누릴 것으로 전망한다. 이제 광화문 광장은 텅 비었고, 민주주의는 비정규직이 되어 슬프다고 한다.

시인은 희망이 없다고 한다. 결코 역설적 표현이 아니다. 시인은 지금의 민주주의를 비정규직 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 자본과 소수 기득권이 휘두르는 권력은 민주주의를 언제든지 잘라버릴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입으로만 진보를 외치고 지폐가 깔린 길을 고르며 일조하고 있다. 아주 날카롭고 적확하게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자 넘어야 할 화두를 던졌다. 이 시대를 표현할 길이 없던 엉거주춤한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해줬다. 언제 잘릴지 몰라 비루한 신세인 비정규직 민주주의 시대를 끝장내려면 땅을 갈아엎어 토양을 바꾸라고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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