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동 더하기 25

사당동 더하기 25
1986년 4월 22일. 철거 재개발이 지역 주민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를 하려고 '30대 중반의 사회학자와 인류학자 그리고 현장 조사 조교 남녀 대학원생, 이렇게 4명이 현장(13)'에 진입한 날이다. 현장은 사당4구역 2공구 재개발 지역으로 남성시장 입구 왼쪽으로 난 사유지 길로 들어가 약 300m에 이르는 산비탈이다. 철거가 진행되고 몇 가족을 추적 조사하다가 영구 임대 아파트로 이주한 '금선 할머니' 가족을 2011년까지 25년 동안 집중하여 관찰한 기록이다.

사당동은 서울시가 1960년대 서울 도심의 재개발을 위해 충무로, 중구 양동, 영등포구 대방동 철거민을 강제 이주시키며 형성됐다. 1968년까지 약 4000명을 트럭으로 옮겨 정착시켰다. 그 후 '무작정 상경했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무슨 이유든 싸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이주(114)'하며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지역 주민들의 주거 공간은 '가옥의 대지는 분양 당시 가구당 10평씩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옆집 대지를 사들여서 넓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10평인데 이 10평에 대부분 방이 세 개 이상 들어앉아 있고 2층으로 올린 경우에는 방이 더 많았다. 자가인 집주인들에게 방을 들어앉히는 것은 곧 수입을 뜻했다. 이 지역의 한 가구가 사용하는 방의 수는 평균 1.6개다. 자기 소유 가구는 2.2개, 전세 가구는 1.5개, 월세 가구는 1.2개로서 세입자들일수록 적은 수의 방을 쓰고 있다. 방 수 에서만이 아니라 사용하는 방의 평수도 자기 소유 가구는 4.6평, 전세는 2.9평, 월세 가구는 1.8평으로 차이가 난다. 가구별 가족 수는 자가 소유 가구나 세입자 간에 차이가 없는데도 세입자들이 사용하는 방의 수효나 평수가 작은 것은 이들이 주거 공간을 줄여 생활비를 줄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115)'.

'어떤 가구는 한 집에 열여덟 가구가 세 들어 사는데 집주인이 다른 사유지에 살고 있어 그 집 1, 2층을 관리해 주는 대신, 월세를 싸게 해서 살고 있었다(116)'. 주민들은 '생업이 불안정해 늘 빚을 얻거나 외상을 달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125)'. 1922년생인 금선 할머니는 파출부이며 생활보호대상자다. 청진에서 태어나 전쟁 통에 월남한 할머니의 딸은 1943년, 아들 수일 아저씨는 1948년생이다. 할머니의 손자녀 즉 수일 아저씨 자녀들은 '산업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에 모두 출생했다. 큰손자 영주 씨는 1973년생이며 사당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 중학교 1학년이었다'. '손녀 은주 씨는 1976년생이며 세 아이의 엄마다(27)'. 막내손자 덕주는 1979년생이다.

'할머니 가족을 따라다니기로 선택할 때 연구자의 가장 큰 관심은 빈곤의 세대 재생산이었다.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은 가난한 가족에게 주거공간이 제공되면 빈곤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22)'. 책은 철거 재개발 지역에서 만난 가난한 가족을 25년간 따라다니며 들여다보는 기록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몸뿐인 이들에게 더는 기댈 곳이 없어졌을 때 그리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을 때 잦은 가정 폭력이나 알코올 중독은 또 다른 빈곤 문화라 불리는 삶의 양식이다. 할머니 가족의 경우 손자녀 세대에 와서 이러한 빈곤 문화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빈곤 문화가 이들 가족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빈곤함이 그리고 빈곤의 재생산 구조가 이들 삶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난의 조건에 대해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들 가족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현하고 있다(314)'. '가난함의 경험은 그 가난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지만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활양식(310)'이 되었다. '가난이란 어떤 적극적인 의미까지 가지고 있어서 빈민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구조이자, 근거이자, 방어 기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가난의 문화는 유난히 견고하고 지속적이며 대대로 전수되는 생활양식이다(269)'.

'빈곤층 여성들에게 가난한 가족으로부터의 피난처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시 가난의 덫이 된다(293)'.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10대 때 남자를 만나 동거를 하고 아이를 낳거나 헤어지거나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다. 그렇게 살다 남편 수입이 시원찮으면 부업을 시작한다. 부업을 하다 일거리가 없으면 노래방 도우미 아르바이트도 한다. 가끔씩은 친구들과 스트레스를 풀러 나이트에 가서 눈길을 보내는 남자를 만나면 따라나선다. '새로운 사랑이다. 이들의 연애 각본은 곧 이들의 빈곤 회로의 일부다. 이런 사랑 이야기는 사람 이름만 바꿔 넣으면 될 만큼 각본이 거의 같다(293)'.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세계화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세계화된 가난' 또는 '가난의 전 지구적 확산'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와 임금은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 노동의 영향을 받았고 결혼 상태를 찾는 일마저 세계화의 영역 안에 있다. 영세 업체들은 싼 임금을 찾아 모두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 여성을 고용하면서 이윤 남기기를 시도한다. 빈곤층의 남성들은 배우자로 결혼 이주 여성을 맞고 '다문화'라는 또 다른 빈곤 문화 범주를 추가하고 있다(312)'.

'이들의 가난은 세계화와 금융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같은 구조적 요인과 동떨어진 듯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삶은 바로 그러한 구조적 요인의 직접적인 충격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적 충격 속에서 그들이 살아 내는 방식, 곧 삶의 양식이 빈곤 문화라고 이름 붙여진다(313)'. '이주 여성의 결혼은 한편으로 값싼 이주처럼 보이지만 참 값비싼 이주였다. 친정 한 번 가는 여비로 1년 치 저금을 몽땅 써야만 하는 것이다(321)'.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것이 어느덧 제3세계 가난한 가족과 그들의 친밀한 관계에 밀고 들어오는 현장도 엿보게 되었다(33)'.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를 가져오는 구조에 주목하게 되었다. 빈곤 문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며 가난을 설명하는 데 가난 그 자체만큼 설명력을 가진 변수는 없다. '가난의 구조적 조건'이 있을 뿐이다(304)'. 저자는 25년에 25년이 더해져도 같은 이야기를 쓰게 될지 두렵다고 했다. 기본소득, 기초자본 등 팬데믹 이후 21세기 분배의 상상력이 어여 실현되길 기대한다.

사당동 더하기 25/조은/또하나의문화 20120515 336쪽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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