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이산하

시인의 말 - 이산하

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여 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악의 평범성/이산하/창비 20210205 148쪽 9,000원

28살 무렵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적의 심장부에 두번째 폭탄을 던지는 심정으로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썼다.1

모난 돌과 바위에
부딪혀 다치는 것보다
같은 물에 생채기
나는 게 더 두려워
강물은 저토록
돌고 도는 것이다.2

누구나 그렇듯 상처 준 것들보다 상처 받은 것들을 먼저 기억했다.3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4

우리 시대의 꿈은 90%가 자본의 덫이다.5

죽은 자 여럿이
산 자 하나를
따라가고 있다.6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7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8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9

촛불을 삼킨 스타 괴물들이 지상을 배회하고 있다.10

낡은 것이 갔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
그 순간이 위기다.11

그러니 심지 없는 촛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기극권자들을 위해 적당하게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난 촛불이 타오를수록 더욱 슬프다.12

자본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한 사람이 쪽박이고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열 사람이 쪽박이다.13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며 폭주하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이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14


현대사 앞에서 나는 문상객이었나 상주였나 되돌아보며 참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 항소이유서
  2. 크리스마스 선물
  3. 나무
  4. 멀리 있는 빛
  5. 추모
  6. 악의 평범성 1
  7. 악의 평범성 2
  8. 악의 평범성 3
  9. 스타 괴물
  10. 새와 토끼
  11. 촛불은 갇혀 있다
  12. 흙수저
  13. 엥겔스의 여우사냥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