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서울의 하루는 다른 곳의 하루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다. 서울의 일 제곱킬로미터는 다른 곳의 일 제곱킬로미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옮겨 다녀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공간이다. (29)
  • 상품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생존의 그물망 속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을 가져다주며, 참으로 잔인한 일이지만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우월감도 가져다준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들어갈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네트워크에는 이러한 특성이 있다. 그 네트워크는 실제로 베풀어 주는 것 이상으로 네트워크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 자체를 통해 일종의 환상적 만족감이나 편익을 준다. 물신(fetish)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34)
  • 일반적으로 '낮은' 질의 여가는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대량 생산품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높은' 질의 여가는 표준화·규격화되지 않은 고객 맞춤형 제품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9)
  • 자본주의사회에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누구나 질 좋은 노동력을 만들어내고 그 질 좋음을 시장에서 인정받아야 먹고살 수 있다. (...) 노동력 재생산이 결국 점점 더 자본이 짜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이기도 하다. (51)
  • 우리와 그들의 구별 짓기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상대를 압도하는 '성전'의 하드웨어,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 함부로 진입할 수 없는 사회적 네트워크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간 구조는 고급 아파트나 쇼핑몰, 놀이동산, 심지어는 패키지여행의 그것과 닮아 있다. 디즈니랜드에는 미국이 없고 코엑스몰에는 서울이 없듯이, 교회에는 기독교가 없는 것이다. (133)
  • 렌트의 기본적 형태인 임대료나 그것이 한국적으로 변형된 권리금은 강남이나 강북을 가릴 것 없이 지주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서 유지된다. 그러니 이를테면 더 많은 고객을 가지고 더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강남의 커피 전문점도 고객이 훨씬 적고 가격이 훨씬 싼 변두리 커피전문점에 비해 그다지 높은 소득을 올리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21세기 서울의 경제지리학에 관철되는 법칙 중의 하나라면 과장일까? (143)
  • 거래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피라미드형 위계는 그대로 유지하되 각각의 고리는 고용 관계가 아니라 거래 관계로 바뀌며 직접 거래하는 상대가 아닌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방식, 이익은 위로 몰리고 위험은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 이른바 '유흥주점형 경제 모델'이 성립한다. (211)
  • 꿈꾸는 공간에 이미 들어가 있는 이들은 그곳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이들을 따돌리고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환상을 충족하기도 한다. 바로 그럴 때, 역설적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의 환상 또한 더 커지게 마련이다. 누구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 바로 배제의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238)
  •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신자유주의로 이행된 것이 보험의 원리에서 복권의 원리로의 이해이었다면, 복지국가를 경험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은 노력에 따르는 성공이라는 복권을 꿈꾸는 사회에서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사보험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80)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류동민/코난북스 20141215 286쪽 14,000원

"내가 그때 말죽거리에 미나리 밭 몇 백 평만 사놓았어도……"라는 상투적인 푸념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시초축적(始初蓄積, primitive accumulation)이 일어난 메커니즘을 세속적으로 포착해 드러내는 형식입니다. 시초축적이라는 용어는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부지런하게 노력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것임이 틀림없다는 신화적 설명으로 "태초에 부지런한 이가 있어......" 오늘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누군가의 권리와 이익을 약탈해 부를 쌓은 것입니다.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를 개인이 자신의 것으로 누리면 착취가 됩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부지런한 이가 있어......"라는 신화는 "태초에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이가 있어......"라는 현실이 됩니다.

'각자 재주껏 살아남기'라는 원리가 생존 원칙이 된 세상을 정치경제학 관점에서 보는 서울 이야기입니다. 서울 이야기이지만 꼭 서울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버티고 사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1980년 언저리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이라면 익숙한 건물이나 골목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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