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밀가루가 키운 지은이가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올리러 갑니다. 세상 음식을 라면과 라면이 아닌 음식으로 간단하게 분류합니다. '라면은 먹고 싶은 어떤 음식을 대체해서 가성비로 먹는 그런 카테고리의 음식이 아니'라 '오직 라면이라서 먹는 것(38)'이라며 단호합니다. '봉지라면을 이기는 유일한 음식'은 컵라면이라고 합니다. '봉지라면이 없을 때 아쉬운 대로 컵라면을 먹을 순 있어도 컵라면이 먹고 싶은 순간 봉지라면을 먹는 건 불가능(41)'하기 때문입니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면이 먼저인가 수프가 먼저인가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에 맞먹는 난제(103)'이지만 결국 취향의 문제이니 알아서 하면 됩니다. 라면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물의 양과 끓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조리법보다 조금 적게 넣고 끓이다 부족하다 싶으면 끓인 물을 적당히 추가하면 됩니다. 끓이는 시간은 '끓이고 또 끓이다 보면 그 순간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는 있'게 됩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의 앞문 위치를 예측해 정확히 맞추어 서 있(127)'는 기술과 비슷합니다.

라면은 커피와 술을 만나기 훨씬 전에 경험하는 '1차 어른의 맛'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영양가는 없지만 맛은 있고, 크게 몸에 해로운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자주 먹어서 좋을 건 없는, 그런 음식도 먹으면서(149)' 자랍니다. MSG의 맛을 모른 채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라면은 '씁쓸하지만 달콤하고, 시큼하면서도 새콤하고, 짜다가도 싱겁고, 그렇게 알고 있던, 또 몰랐던 맛(151)'을 느끼는 어른의 맛입니다.

냄비가 없어 커피포트에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컵라면을 끓여 먹으면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다 만사가 귀찮아지면 찬물에 면과 수프를 한꺼번에 때려 넣고 끓여 먹습니다. 김치와 단무지도 필요 없고 오로지 라면만 먹는 걸 최고로 꼽는 저자에게 라죽을 권하는 건 실례이겠지요. '라면을 건강하게 먹는 법'은 '라면을 먹기 위해 건강해지는 법만 있을 뿐(156)'입니다. 라죽이 먹고 싶다고 아프면 안 됩니다.

재미있고 맛있게 읽었습니다. '놀고 낭비하는 게 오늘을 사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데 동의하는 친구와 가까이에 산다는 건 행운(117)'입니다. 좋아하는 라면을 먹으며 라면 같은 글을 쓰길 바랍니다. 훗날 누가 묻거든 내 글의 8할은 라면이 썼고, 나머지 2할은 호떡이 썼다고 멋지게 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윤이나/세미콜론 20210305 164쪽 1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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