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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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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로 일하던 손열매는 마치 우는 사람의 어깨처럼 삶이 흔들렸습니다. 룸메이트이자 대학 선배였던 고수미가 돈을 떼먹고 자취를 감췄기 때문입니다. 시멘트공의 피가 흐르는 손열매는 떼인 돈 천삼백을 받을 요량으로 고수미의 고향인 완주로 갔습니다. 고수미의 엄마는 매점을 하며 장의사 일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동시성을 가진 매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곳에 고수미는 없었고 엄마와도 연락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손열매에게 서울은 방귀를 뀌고 싶어도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간격을 확보하지 못해 참아야 해서 별로였습니다. 갈 곳 없던 손열매는 매점에서 알바를 하며 얹혀 지내게 됐습니다. 잘생긴 리트리버 같은 동네 청년 어저귀, 아침마다 양미네 집 앞에서 잠을 깨우는 푸틴과 간디, 입이 자물통 같은 이장, 시고르자브종인 샤넬과 산책 나오는 은퇴한 배우랑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됐습니다. 어저귀는 스스로 나무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존재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나무는 "뿌리와 뿌리가 맞닿고 흙 속의 곰팡이가 연결선을 만들면서 안부를 전하고 서로 위급한 신호를 보내고 영양분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손열매에게 우드 와이드 웹( Wood Wide Web )을 알려줬습니다. 어저귀 덕분에 손열매는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신비한 체험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창인 고수미 눈에는 어릴 때부터 말이나 행동이 엉뚱해 외계인으로 보였습니다. "인생은 독고다이, 혼자 심으로 가는 거야. 닭알도 있잖여? 지가 깨서 나오면 병아리, 남이 깨서 나오면 후라이라고 했어." 한숨 쉬는 손열매에게 닭장집 할머니가 알려 줬습니다. 춤바람난 중학생 양미에게 배운 슬픈 얘기는 하지 말자는 말을 다시 만난 고수미에게도 그대로 해줬습니다. 손열매는 완주에서 맞은 첫 여름을 그렇게 완주했습니다. 내가 내 맘속에 지어 놓은 사랑은 잃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습니다. 손열매는...

조종이 울린다 - 자본주의라는 난파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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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언제나 갈등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영원히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며, 역사적으로 우연히 나타나고 불확실하게 지지할 뿐만 아니라 제약하기도 하는 여러 사건과 제도들에 크게 좌우되는, 있을 법하지 않은 사회 형성체 social formation 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애덤 스미스와 계몽주의의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회, 즉 자신의 '진보'를 생산적 자본의 지속적이고 무제한적인 생산과 축적에 연결하는 사회라고 간략하게 묘사할 수 있다. 이런 생산과 축적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에 의해 물질적 탐욕의 사적인 악덕이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됨으로써 이루어진다. (10) 실제로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경제적·사회적 제도가 밑바닥에서부터 변형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살아남은 위기의 연속으로 서술할 수 있으며, 이 위기들은 예측할 수 없고 종종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파산에서 구해주었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 질서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토록 자주 이 질서가 붕괴 직전으로 내몰리고 계속해서 변화해야 했다는 사실만큼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질서는 종종 내부에서 동원할 수 없는 지지를 우연히 외부로부터 받으면서 겨우 살아남았을 뿐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임박한 죽음에 관한 온갖 예측을 뛰어넘어 생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14) 꾸준한 성장과 건전한 화폐, 약간의 사회적 형평성 덕분에 자본주의가 낳은 혜택의 일부가 자본 없는 이들에게도 확산되었는데, 이런 사실은 오랫동안 자본주의 정치경제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간주되었다. (...) 불평등의 증대가 생산성 향상을 방해하고 수요를 약화시켜서 성장을 둔화시키는 한 요인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늘고 있다. 거꾸로 저성장은 분배갈등을 격화시키면서 불평등을 강화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비용이 높아지는 한편, 부자들은 자유시장을 지배하는 '마태 원리 ...

최저임금과 최대임금은 연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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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고소득자 연봉 제한 법안의 채택이 불발됐다. 스위스 언론들은 24일 실시된 '1대 12' 법안이 국민투표 결과 부결됐다고 전했다. 이 법안은 한 기업에서 최고 급여가 최저 급여의 12배를 넘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다. 개표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에서 반대가 66.9%, 찬성이 34%로 반대가 2배 가까이 많았다. 앞서 수 차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반대가 훨씬 많았다. 스위스 청년좌파단체 젊은사회민주주의(JUSO)가 주도한 이 법안은 2011년 3월 시민 11만3,005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1년 6개월간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모으면 누구나 법안을 발의해 연방정부 및 연방의회 검토를 거쳐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JUSO는 스위스가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7만8,881달러(8,369만원)로 세계에서 세번째로 잘 살지만 소득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며 법안을 발의했다. 스위스는 앞서 3월 상장기업 임원을 대상으로 기업간 연봉차이 제한 및 300만스위스프랑(34억8,744만원) 이상 보너스의 세금 부과 등 24가지 요구가 담긴 CEO고액연봉제한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킨 바 있다. - 한국일보 20131124 2013년 스위스에서 실시한 '임금비율제한' 법안은 경영진 월급이 그 회사에서 가장 임금이 낮은 노동자들의 1년 임금(12달 임금)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최대임금제에 관한 법안(1:12 initiative)입니다. 같은 회사에서 가장 낮은 급여를 받는 사람이 1년에 벌어들이는 것보다 한 달에 더 많은 돈은 벌지 말자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법안은 주민투표에서 34%만 찬성해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부결된 원인 중 하나는 경영자 측에서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을 했다고 합니다. 올해 최저임금은 시급 10,030원이고, 연봉은 25,155,240원(2,096,270원×12개월, 세전)입니다. 최저임금제가 있으면 최대임금제도 있어야 합니다. 최대...

탈코르셋 선언 - 일상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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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운동은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유용한 여성-신체자원(자궁-여성 유기체로서의 대상)으로 동원, 소비, 착취, 억압되는 것을 거부하는 움직임일 뿐만 아니라, 이때껏 스스로의 신체의 교환가치를 더 높이고 적어도 남성의 성애적 욕망의 투여가 일어나지 않는 무가치한 몸(교환가치=0)으로 전락하지 않고자 지속적이며 의무적으로 수행하던, 일체의 꾸밈노동을 집단적으로 보이콧하는 행위입니다. (23) 여성의 신체 역시 남성적 담론과 실천의 장 안에서는 교환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 되며, 따라서 일종의 상품으로 기능합니다. 그리하여 사실상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는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 속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교환가치가 인정되는 상품으로 존립시켜야 할 대상이 됩니다. 달리 말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연적으로 여성-신체자원이라는 '천연적 노동대상물'을 타고 났으며 이를 보다 세련되게 관리하고 정교히 세공해내는 기술을 투입함으로써 스스로의 신체를 '가공된 노동대상'으로 탈바꿈하는 '꾸밈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33) 현재 탈코르셋 운동은 10대, 20대의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주축으로 실천되고 있으며 이는 비혼-비연애-비출산-비섹스라는 4B(4非) 운동의 선언과 면밀히 연결된 운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을 통해서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더 이상 가부장제 사회의 결혼제도나 이성애적 연애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남성들이 지닌 '보슬아치' 환상의 가능조건 자체를 근본적으로 분쇄해버립니다. (51) 탈코르셋 운동은 가부장제에 의해 위계적이며 불균등하게 배치되어 왔던 여성의 신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조건 아래에서, 전혀 다른 물질적 관계 속에서 새롭게 배치하려는 운동입니다. (69)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는 여성들에게 '남성이 되고 싶어서 그러느냐'라고 조롱을 던지는 것은 사실상 남성형...

나무와 돌과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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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뿌리, 줄기, 가지, 잎, 꽃, 열매. 그중에서도 요즘 단연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잎이다. 우리가 흔히 소리내어 말을 하듯 나무는 잎으로 소리 없는 말을 한다. 그 말을 알아들을 귀가 내게 없을 뿐이다. 뿌리가 없어 두리번거리는 우리는 사람의 말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중심이 분명한 나무에게 무슨 말이 그리 많이 필요하랴. 서걱이는 바람 소리와 단호한 침묵의 언어가 있을 뿐. (11) 아파트가 생기면서 골목이 없어졌다. 일직선으로 죽죽 뻗어 나가는 곳에서는 곡선의 골목을 품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효율의 시대에 그러한 곡선은 낭비인 것이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골목은 호기심의 아버지이다. 구부러지는 곳에서 호기심은 태어난다. 호기심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이 놀 이유는 없다. 골목이 없어지면서 골목의 아이들도 떠났다. (19) 입춘이다. 이십사절기에는 입하, 입추, 입동도 있지만 입춘은 어쩐지 그들과 격을 달리하는 것 같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것보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변화는 체감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다. 입춘은 세상이라는 꽃이 제대로 확 벌어지는 변곡점이다. (23) 귀 기울이면 골짜기의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돌은 자음, 물은 모음. 둘이 완벽하게 결합하여 빈틈없이 꽉 짜인 단음절의 문장을 부지런히 아래로 실어 나르는구나! (31) 해와 달이 아름다운 건 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저 알맞은 거리가 있어서 몸은 데이지 않고, 마음은 베이지 않는다. 꽃이 꽃으로 아름다운 건 땅에서 이만치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일락 말락 줄기나 가지 끝에 수줍게 달려 있는 봄꽃을 맞닥뜨리면 그런 실감이 든다. (33) 쓴맛이 좋아지고 나서부터 봄에 대해 매해 다르게 보려고 한다. 봄이라는 글자를 골똘히 보기도 한다. 무덤의 상석 같은 'ㅁ'에 사다리 같은 'ㅂ' 그 사이를 연약한 풀 한 포기가 연결...

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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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은 2020년 1월 28일에 태어났습니다.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습니다. 고아원에서 18년, 주방 보조로 25년을 살았습니다. 고아원과 주방, 이 두 곳이 우환이 가본 세상 전부입니다. 해가 바뀌는 2064년에도 여전히 주방 보조를 할 생각입니다. 곰탕 이야기를 자주 하던 식당 주인은 우환에게 시간 여행을 제안합니다. 과거로 가서 곰탕 국물 맛을 배워오면 돈은 물론 식당을 내준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나, 그렇게 죽으나 언제 죽어도 그만이었던 우환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40여 년을 거슬러 2019년에 도착했습니다. 시간 여행선에 열셋이 타고 출발했지만 우환과 김화영이라는 소년만 살았습니다. 김화영은 사람을 죽이러 왔다며 먼저 도시로 사라졌습니다. 우환은 부산곰탕집을 찾았고, 은근슬쩍 눌러앉아 국물 맛을 배웁니다. 이종인이라는 식당 사장은 우환과 나이가 비슷했고, 이순희라는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순희는 우환이 기억하는 이름입니다. 이순희와 유강희는 18년만에 처음으로 부모 이름을 물었을 때 고아원장이 알려 준 이름입니다. 이순희와 유강희는 뿅 가는 오토바이라는 뜻의 뿅카를 타고 다니는 불량 고교생이었습니다. "하나도 즐거울 게 없는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두 사람이 하필 서로에게 지나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우환은 이상하게도, 좋은 순간에는 강희와 순희가 자신의 부모일 리가 없다고 여겨지고, 불안함을 느낄 때는 분명히 이 연놈들이 내 부모다 싶어, 화가 났"습니다. 이우환의 불행은 이순희, 유강희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주앉은 일흔아홉이 된 이순희는, 쉰아홉이 된 이우환에게 모든 것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 하나가, 지 혼자 망쳐지나. 니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나는 모든 게 달라졌다. 니가 태어난 후로." 행복에 대한 희망이 없던 이우환에게 행복에 대한 소망이 생기며 벌어진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영속패전론 - 전후 일본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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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 2012년 7월 16일 도쿄 '요요기 공원'에서 열린 '사요나라 원전, 10만 집회'에서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하여 외친 말이다. 이 말은 3.11 동일본 대지진 이래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을 모자람 없이 적확하게 표현한다. 그렇다. 우리는 실제로 모욕 속에 살고 있고, 모욕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21)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모욕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권력 구조와 사회 구조는 3.11 사고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구조는 일본 역사에서 끊임없이 존속, 유지, 강화돼 왔으며 그동안 철저히 은폐된 것들이 명백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요컨대, 전후 체제는 전전(戰前)이나 전중(戰中)을 그대로 빼닮은 '무책임의 체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패의 산물이다. (28) 전율을 일으키는 이런 정세 속에서 내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신이 하나 있다. 바로 '전후'라는 역사의 단락으로 오랜 기간 지속됐던 하나의 시대가 확실하게 끝났다는 믿음이다. 달리 말해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사고로 '전후'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전쟁과 쇠퇴의 시대가 왔음을 뜻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전후'를 총괄한 기본적인 신화(곧 '평화와 번영')를 근본부터 다시 해석해볼 때가 됐음을 의미한다. (37) '전후'의 시작을 어떤 말로 인지하는지 생각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전후'의 시작인 8월 15일은 어떤 날인가? 일반적으로 이날은 '종전 기념일'로 불린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전쟁이 저절로 '끝났'을 리 없다. 전쟁은 대일본제국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일본의 패배로 끝났다. 그런데도 이날은 전쟁이 '끝난' 날로 인식되고 ...

인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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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고 있는 행성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당신이 해온 역할의 역사는 지금 새롭게 쓰이는 중이다. 이 역사의 새로운 장에서 당신은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우리 인간들, 즉 안트로포스(Anthropos)는 지구의 작동을 너무나 거대하게 변화시켜왔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제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 명칭을 통해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전 지질시대와는 달리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이 되었음을 표시하기 위해 인류세라는 용어를 쓰자는 제안은 학계 안팎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6) "우리는 인류세에 살고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은 2000년 한 학술회의장에서 절망스럽게 외쳤다. 크뤼천은 자신의 동료들이 현시대를 여전히 홀로세(Holocene)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좌절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빙하기가 끝난 이후로, 즉 홀로세가 시작된 이후로 인간은 너무나 명백하게 지구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지구의 현 지질시대를 우리 자신의 이름, 즉 인간을 의미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에서 따와서 명명하자는 제안은 크뤼천이 외쳤던 순간부터 학계 안팎에서 대단한 관심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10) 지질시대는 지구의 46억 년 역사를 지질학적 누대(累代, eon), 대(代, era), 기(紀, period), 세(世, epoch)로 세분화하는 공식적이고 국제적인 협의가 이뤄진 정리 방식이다. 새로운 지질시대를 선언하기 위해서는 지질학자들이 자신들만의 과학적 방법, 절차, 증거를 적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구적 차원에서 인간이 암석 안에도 분명한 표시를 남겼음을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63) 인간은 단순히 지구의 대기권과 기후를 변화시킨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은 생물다양성을 지구적으로 감소시켰고 농업활동을 하면서 유출한 비료로 해양을 오염시켰으며, 바다로 가는 강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고 전 세계에 걸쳐 자연 서식지를 변화시켰다. (99) 인간...

노동의 미래가 아무리 멀다지만 - 정여름 집사를 지지하는 짧은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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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ate of the unions in Canada 정여름 집사가 느닷없이 짤렸다. 모든 일은 쌍방 얘기를 들어야 시시비비가 가려지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얘기라면 그렇지 않다. 무조건 비정규직 하소연이 맞다. 적어도 한반도 이남에선 그렇다. 가난한 소년공이 대통령 되어 하루아침에 노동자 세상으로 변해도 비정규직은 암울하다. 이 현실을 뒤집는 혁명 적 흐름이 삼십 년을 가지 않는 한 비정규직은 언제라도 슬프다. 위로를 대신할 말이 없다. 그래서 정여름 집사를 지지하며 연대한다. 정여름은 노동의 미래 다. 지금은 집사의 노동으로 생활한다. 아주 가까운 미래는 AI가 올린 수익으로 기본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모든 생명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생존해야 한다. 사람 탈을 쓴 자본 은 모든 걸 갈취한다. 정여름이 꿈꾸는 노동의 미래 가 아무리 멀다지만 이러면 아니 된다. 그러지 말자. 이 말은 지금까지 멸종한 생물이 건네는 말이다.

공정 이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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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공정'에 관한 책이 아니다. 나는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어서 이 책을 집필했다.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사실 좀 답답하다고 느껴왔던 것은 아닐까? 꽤 오랫동안 '공정'을 주제로 한 대동소이한 글들이 뻔한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이건 공정하지 않아!"라고 누군가가 외치면, 다른 의제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공정한가, 불공정한가"를 따지게 되어버렸다. 정치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모든 말들을 '공정'으로 포장했고,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앞다투어 '공정'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마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공정' 단 하나뿐인 것처럼. 하지만 이 지나친 떠들썩함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요란한 약속들이 내 삶을 바꾼 것은 없었으니까. (5) 모두가 공정한, 즉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따라서 내가 부당하게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는(다시 말해, 똑같이 보상받거나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신념은 각자도생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삶의 방식을 정당화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공정성 모델은 구조적·역사적 불평등을 무화시키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의 효과를 지워버리는 원자화 atomization 모델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원한다"는 외침은 결국 "성공하고 싶으면 노력해라" "네가 가난한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어쩌면 동전의 양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온전한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외면하게 만든다. 모든 개인은 노력을 통해 성취해야 ...

박태웅의 AI 강의 2025 - 인공지능의 출현부터 일상으로의 침투까지 우리와 미래를 함께할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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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30일 챗GPT가 나타났습니다. 그 후 불과 1년여 사이에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Al 은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과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문가들도, 쏟아져 나오는 논문들을 따라 읽기가 벅차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24) 운영체제로서의 인공지능(AI as OS) 맥락 인터페이스(Contextual Interface) 파트너로서의 인공지능(AI as a Partner) 멀티모달(Multimodal) 더 저렴하게, 더 빠르게, 더 작게(Cheaper, Faster, Smaller) 인간형 로봇, 휴머노이드(Humanoid) 인공지능이 하는 이런 일은 '잠재된 패턴들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네다섯 살만 되어도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분합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구분할수 있는 패턴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구분할 수 없을 테니까요. (80) 말하자면 지금의 인공지능은 '어려운 일은 쉽게 하고 쉬운 일은 어렵게' 합니다. 잠재된 패턴이 없는 곳, 그러니까 확률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에서는 어처구니없이 약합니다. 챗GPT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거의 모든 문서를 학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이 말은 웹에 없는 정보에는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다섯 자리 이상의 더하기, 빼기의 모든 셈 결과가 웹에 다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123,456,789+56,789 와 같은 셈의 결과들이 모조리 인터넷에 올라와 있을 리는 없으니, 챗GPT는 이런 셈을 잘하지 못합니다. (95) 오픈AI는 최근 인공지능의 다섯 단계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205) 챗봇 Chatbots 추론가 Reasoners 에이전트 Agents 혁신가 Innovatorsy 조직 Organizations 스스로 개선을 해나간다면 그 인공지능이 어느 시점에서 인공일반지능, 즉 인간의 지능을 넘어...

노랑의 미로 - 가난의 경로 5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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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을 등지고 한강대로를 건너 직선거리 400미터. 남대문경찰서에서 남산 방향 도로를 건너 북동쪽으로 250미터. 힐튼호텔로부터 비즈니스·문화·역사·쇼핑의 중심을 건너 동쪽으로 300미터. 그 위치가 가난의 위치 였다. (80) 첨단과 수직의 고층빌딩 아래에서 낡았고, 삭았고, 헐었다. 벌레가 파먹은 듯한 지구의 후미진 땅에서 동자동이 도시의 뒷면을 구성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소의 주거 공간에서 인간에게 던져진 가장 남루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죽음과 동거했다. 그들은 한 건물에서 살았지만 남모르게 죽었다. (32) 9-2× 는 동자동에서도 월세가 가장 싼 건물에 속했다. 보증금 없이 지하는 14만 원, 1~3층은 15만 원, 4층은 16만 원(가장 큰 방인 404호는 18만 원)이었다. 월세는 수도세·전기세를 합한 금액이었다. (...) 9-2×와 이웃한 건물들의 방값은 월 17만 원이었다. 20만 원에 별도 보증금을 받는 방들도 있었다. 동자동 '여인숙 골목'의 방들은 더 비쌌다. 9-2×에 내는 돈으로 이사 갈 수 있는 방은 동자동에도 더는 없었다. (64)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방 한 칸을 집 한 채로 알고 살도록 9-2×는 지어졌다. (67) 가난하다고 망가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가난이 망가뜨린 사람과 동네라고 여겨졌다. (84) 건물엔 모두 마흔여덟 개의 방이 있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는 층마다 열한 개의 방으로 쪼개졌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방들이 뚫려 있었고, 방마다 합판으로 짠 나무문이 불규칙하게 붙어 있었다. 4층엔 방이 다섯 개였다. 다섯 개 중 두 개는 9-2×에서 가장 큰 방들이었다. 월세가 3~4만 원 더 비쌌다. 관리인이 그중 하나를 방세 없이 썼다. 마흔여덟 개 방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방은 세 개였다. 지하 방 하나는 창고가 됐고, 1층 교회가 방 두 개를 터서 썼다. 퇴거 사태 전후로 사람이 거주한 방은 모두 마흔다섯 개였다. (60) 2015년 2월 5일 ...

빈곤의 연대기 - 제국주의, 세계화 그리고 불평등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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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는 놀랄 만큼 부유해졌고 그와 동시에 부의 불평등 역시 지속적으로 심화되었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에 의하면 2014년 기준으로 세계 상위 1퍼센트의 부유층이 전 세계 부의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빈곤층이 전 세계 부의 1퍼센트만을 소유한다. 부의 불평등 정도를 국가별로 비교하면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하다. 같은 해 기준으로 상위 1퍼센트에 해당하는 세계 부자의 80퍼센트 이상이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주요 10개국에 몰려 있다. 그러나 사하라이남 지역이나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1800년대나 지금이나 번영의 수혜를 입지 못한 채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5) 일반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해 대륙 간 경제적·문화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5세기 말 이후를 '최초의 세계화' 혹은 '1차 세계화'로 간주한다. 그리고 정보화에 따른 현대적 의미의 세계화를 2차 세계화라 한다. '최초의 세계화'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스페인이 이 대륙을 식민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31)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경우 주로 무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이윤을 빼앗는 약탈의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영국이나 네덜란드는 약탈 자체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교역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스페인이 포토시에서 은을 자국으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면 네덜란드의 경우 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물건을 사서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가서 처분하고 그 돈으로 다시 그곳의 상품을 사서 다른 곳에 판매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59) 영국이나 네덜란드는 16세기의 스페인처럼 금이나 은을 강탈하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았지만 군사력을 이용해 다른 나라들이 강제로 교역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들 국가는 식민지를 원자재와 노동력의 공급지로, 그리고 완제품의 판매시장으로 활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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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즐랜드 자매로드 - 여자 둘이 여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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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식 분자가족 (W₂C₄ 여자 둘 고양이 넷)인 두 작가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미니멀리스트 도비와 맥시멀리스트 호더가 가방을 꾸리는 일부터 재미있습니다. 콩알만 한 이유에도 잠 못 드는 콩쥬님과 3초 만에 꿀잠자는 두 사람이 '살아 있는 초대형 그림엽서'라는 호주 퀸즐랜드에 갔습니다. 맥시멀리스트인 황하나 작가는 여행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행이란 나 자신을 낯선 환경 속에 던져놓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러 가는 일이다. 거꾸로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나에게 최적화된 즐거움을 추구하러 가는 행위이기도 하다. 모든 일이 기대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어떤 경험도 단정하거나 장담할 수 없다는 점,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빈틈들을 기꺼이 껴안을 때 여행은 훨씬 흥미진진해진다.(67)" 서퍼스 패러다이스에는 "칼로리에 전전긍긍하며 관리한 몸보다는 바닷바람에 깎여나간 것처럼 터프하게 조각된 몸(95)"으로 서핑을 즐기는 이들과 달리기를 하거나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속도로 자연스럽게 사는 모습입니다. 수만 년 전부터 멈추지 않는 파도를 잠시 타며 한순간 그 세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걸 가진 기분을 느낄 수(103)" 있습니다. 그런 해변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찍찍이 캐치볼은 정말 잘 어울리는 놀이입니다. 미니멀리스트 김하나 작가는 럭셔리 호텔에서 무언가를 잠시 잊었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의 삶에서 떼려야 떼어지지 않던 어떤 가치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효율'이었다. 효율에서 잠시 분리됨으로 인해 쉼은 더욱 충만해졌다. 굳이 질 좋은 종이 네 장을 봉투에 넣어 건네고, 사람이 여러 번 오가며 환영의 인사를 전하고, 공간을 불필요할 정도로 널찍하게 제공하고, 꼼꼼히 그 공간을 아름답게 채우는 이런 곳에서야, 근육 깊...

당신의 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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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년 대한민국, 80세 이상 노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자는 시위가 도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명이 보통 100세이다 보니 정년퇴직은 70세에 하고 90세가 넘어서도 일을 합니다. 94세의 할머니가 122세의 부친을 간호하는 세상입니다. 그 부녀가 받는 국가노령연금을 비롯한 보조비와 의료비 할인을 합하면 젊은이 셋의 월급을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청년 세 명이 수입의 반을 내놔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는 꼴입니다. 때마침 노인 투표권 박탈을 공약으로 내건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노인차별주의자들은 자기 세대가 겪는 모든 궁핍을 전부 늙은이들 탓으로 돌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들의 무임승차를 벌충하기 위해 젊은이들 지하철 요금은 밥 한 끼 값이 넘었고, 값싼 고령 인력 때문에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은 정작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하철은 온통 노인들뿐입니다. 젊은이들은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노인들이 왜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냐며 분노합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이고, 노인들은 아이들한테서 잠시 빌려 살고 있다면서 말입니다. 장길도는 70세가 되어 국민연금공단에서 이제 막 퇴직했습니다. 장길도는 퇴직하기 전까지 국민연금공단 연금이사 산하 기금합리화 지원실 소속 노령연금TF팀의 외곽 공무원이었습니다. 납입액을 상회하는 노령연금 수급자들은 적색 리스트에 오릅니다. 외곽 공무원은 연금 과다수급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조기 사망할 수 있게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 즉 본인의 부주의나 불운해서 죽은 것처럼 꾸미는 일입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강제로 처리합니다. 노화라는 국가적 동맥경화를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외곽 공무원이 암약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장길도는 죽은 노인은 착한 노인이고, 자살한 노인은 우리 사회의 동지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요양병원에서 요양을 하는 아홉살 연상인 아내 한수련은 9년 전부터 노령연금 수급자입니다. 장길도가 퇴직하자마자 한수련은 노령연금...

도서관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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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다.(A library is a growing organism.)' 이 문장은 도서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도의 수학자이자 문헌정보학자인 S. R. 랑가나단이 제시한 '도서관학 5 법칙' 중 마지막 법칙이다. (4) 도서관은 이미 아날로그 및 디지털 정보와 지식을 입력(input)하는 수준을 넘어 입력된 내용을 기반으로 상상하고 창작하는 출력(output)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지식정보를 제공하는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는 태도를 살펴봐도 시설과 장서를 관리한다는 관점이 이용자와 사서의 소통에 주안점을 둔 사람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14) 지나친 이기심 때문에 친구도 이웃도 없다는 오늘날, 공공도서관이 지역사회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이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주민들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의 가치를 확인하고, 활성화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35) 게다가 '메이커 스페이스 maker space ' 로 대변되는 창의 공간 기능까지 요구받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독서를 하면 좋다'면서 입력(input)만 강조하던 도서관이 '독서를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란 질문을 던지면서 출력(output)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46)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상상력, 창의력, 융합, 감성, 윤리 등 아날로그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해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디지털 대전환이 진행되면 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아날로그 영역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우리 삶의 본질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논의와 고민에서 도출되기 때문이다. (72) 이제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코로나 일상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기존 생각의 틀을 완전히 바꿈으로써 변화된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디지털 대전환을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세대는 디지털 대전환을 단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 가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특별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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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영화를 만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아무리 귀찮아도 만날 수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가족이다' 그런 실감이 나를 새로운 해방구로 이끈다. (7) 내 기억 속 이카이노는 여성들이다. 이카이노에 사는 할머니, 어머니, 며느리, 딸들은 제주도와 경상도, 오사카 사투리로 말했다. 뼈 빠지게 일하고 호탕하게 웃던 그녀들 뒤에는 가혹한 역사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둘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계속 파헤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24)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31) 지금에 와서야 짐을 싸던 어머니의 미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눈에는 일본에서 온 상자와 봉투를 열어보고 기뻐할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오직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볼 수 없는 가족의 웃는 얼굴을 매일매일 떠올리면서, 그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도록 다음번 소포에 무얼 담을지 궁리했을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씁쓸함을 상상으로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45년 동안 "부모밖에 못 하지"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을까. (43) 잠옷 차림으로 진심을 말하는 아버지도,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버지도 모두 나의 아버지였다. (88) 새엄마 혜경 씨가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

시인의 오지 기행 - 고요로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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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시인은 "도시 사람들은 왕따가 되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다.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수록 왕따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27)"이 오지에 살고 있다며 "스스로 왕따이기를 자초한 사람들"을 찾아간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31)"라는 백석의 시를 인용하며 오지 사람이 따라준 오디술을 받는다. 염소를 잡는 날이면 염소들이 우리를 나가며 울부짖는다거나 며칠씩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이문재 시인은 전기가 들어오면 그곳은 더 이상 오지가 아니란다. "전기가 들어가고, 도로가 뚫리면 끝장난다(42)"며 히말라야를 여러 번 다녀온 친구에게 들에 들은 얘기를 전한다. 오지는 전기와 신문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단절될수록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유영금 시인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박후기 시인은 오지를 이렇게 말한다. "물리적인 거리, 혹은 도달 시간만을 두고 말한다면 더 이상 '오지'는 없다. 달 표면에도 이미 인간의 발자국이 찍혔으며, 패스파인더(미국의 무인 화성 탐사선)는 화성의 어느 골짜기에서 추위를 견디며 길을 찾고 있다. 마음에서 잊힌 곳을 찾아간다고 했을 때, 오지라는 말은 비로소 원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지는 깊은 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닿고자 하는 바람으로서의 심원으로도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내 발길이 닿지 않은 서울 하늘 아래 어느 좁은 골목도 오지요, 강과 계곡의 깊숙한 곳 또한 오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10)" 하지만 오지란 살 곳이 못 된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집을 짓지 않고 떠나는 첫사랑처럼, 사람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는 지금 그곳에 있지 않다. 늘 무언가를 찾아서, 누군가를 잊으려 길을 떠나지만, 차마 인연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고 잠시 벗어 둔 옷가지를 챙기듯 주섬주섬 다시 싸들고...

홀로코스트 산업 -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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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홀로코스트 산업의 해부이자 고발장이다. 앞으로 나는 '홀로코스트'가 나치 홀로코스트의 이데올로기적 재현임을 주장할 것이다. 1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처럼, 미약하다 할지라도 홀로코스트 산업은 현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임의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홀로코스트의 중심 교리에는 중요한 정치적·계급적 이해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실제로 홀로코스트는 이데올로기적 무기임이 입증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이용하여 끔찍한 인권 기록을 갖고 있는 세계적인 군사 강대국이 '희생자' 국가로 자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민족 집단이 희생자의 자격을 얻고 있다. 또한 그럴듯한 희생의 허울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35) 1948년 건국으로부터 1967년 6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략적 계획의 중심부에 위치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건국을 준비할 때 트루먼 대통령은 국내 사정(유대인 득표)과 국무부 경고(유대인 국가 지지가 아랍 세계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다는 경고)를 비교하면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한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을 저울질하다 아랍의 손을 들어주었다. (52) 독립 당시에 비해 1967년의 이스라엘은 훨씬 더 강력했다. 이스라엘과 미국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무난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몇 년 안에 이스라엘이 이웃 아랍 국가들을 완패시킬 수 있다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빅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전에 이스라엘을 위한 유대계 미국인 동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놀랍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산업은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가 나타난 후에 비로소 출현했으며, 극단적인 이스라엘 승리주의가 판을 치는 와중에 성공의 궤도에 올랐다. 상식적인 해석의 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