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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와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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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부터 약 석 달 동안 1인 2매 한도에서 요일별로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는 공적 마스크제를 시행했다. 마스크 가격도 일률적으로 적용했다. 근래에 없었던 사회주의 정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사람은 많이 구입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여러 차례 줄을 서서 기다려도 구입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구입해야 하는 등의 불평등한 상황을 반드시 개선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 조치에 대하여 6:4로 적절하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지금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강제 착용이라는 더 강력한 사회주의식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사회주의에 무조건 반대하는 부류인 신자유주의나 재난자본주의도 군말없이 따르고 있다. 서구사회와 달리 이 조치가 적절하다는 여론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방역수칙을 위반하면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인의 권리와 공공의 복리라는 경계선에 관한 문제를 야기시키지만, 우리는 공공의 복리를 우선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애사심이 높은 일용직이라든가, 일본식 영업용 미소가 아닌 한국식 정이라는 공동체 우선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우리는 위기 때 악의 평범함보다 선의 평범함이 우선 발현되는 협동적 공동체이다. 아파트로 대표하는 부동산도 그렇다. 이제 집은 개인의 권리이자 공공의 복리가 만나는 인권이다. 영업제한이나 봉쇄조치로 집에 머무는데 누구는 집세를 걱정하고, 누구는 집값이 오르는 것은 비인도적이다. 마스크는 천오백 원이고 아파트는 십오억이라서 공적 잣대를 달리하면 모순이다. 마스크는 1인 2매씩 사도록 하면서 아파트는 1인 n채씩 사도록 하는 건 정책 부조화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마스크 공급과 관련하여 이렇게 덧붙였다. "공급이 부족할 동안에는 그 부족함도 공평하게 분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적 마스크처럼 공적 부동산 정책을 파격적으로 실현할 때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관점을 통째로 바꾸라는 새로운 주문을 하고 있다.

인간 독종설

먹이사슬에서 호모 속이 차지하는 위치는 극히 최근까지도 확고하게 중간이었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자기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해왔으며 지속적으로 대형 포식자에게 사냥을 당해왔다. 인간의 몇몇 종들이 대형 사냥감을 정기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40만 년 전부터였고,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뛰어오른 것은 불과 1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부터였다. 중간에서 꼭대기로 단숨에 도약한 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다른 동물, 예컨대 사자나 상어는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그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생태계는 사자나 상어가 지나친 파괴를 일으키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사자의 포식 능력이 커지자 가젤은 더 빨리 달리는 쪽으로 진화했고, 하이에나는 협동을 더 잘하도록 진화했으며, 코뿔소는 더욱 사나워지도록 진화했다. 이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떄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것이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의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 사피엔스/유발 하라리/조현욱 역/김영사 20151123 30쪽 작년 8월부터 시작된 아마존 열대우림 산불은 건기를 맞아 되살아나 타고 있습니다. 호주 남동부는 지난해 9월 6일부터 올해 2월까지 산불이 이어졌습니다. 북극권에 속한 시베리아 동토 지역은 40도가 넘는 폭염이 나타나며 산불이 났습니다. 한반도 여름은 54일이라는 최장 장마를 기록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동물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생물분류표에 의하면 북극점에

樂書 역병오적의 시대

역병오적 목사가 앞장서고 판사는 밀어주고 의사가 파업하고 검사는 딴청피고 기자가 부추기는 역병오적의 시대 K-종교 반려인이 반려동식물을 대하는 자세와 그로 인한 위안만 종교로 인정합니다. 평범한 죽음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자들은 '평범한 죽음'이 소원이랍니다. 자연사가 최대 축복인 세상이라서 자연사하면 안 되는 인간말종이 늘어납니다. 좀 많이 늘어납니다. 택배 신선식품이나 생물 빼고는 총알배송이 필요한 물품은 거의 없죠. 그냥 일일 배송량을 스스로 정해 선입선출해도 될 텐데 다음날 몽땅 배달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속달이나 지정날짜를 정한 물품은 배달료를 할증하고 나머지는 순서대로 알아서 잊을만하면 와도 되지 싶네요. 팔월 내 고장 팔월은 몸에서 물이끼가 자라는 시절... 평등 아파트 평수와 아이들 등수로 결정되는 것이 한국적 평등이라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동산 부동산 대책도 마스크 5부제처럼 강력하게 했으면 싶다. 사대강에 23조를 퍼부었으니 기본공공주택에도 23조를 퍼붓거나 강남에 원전이랑 사드를 설치하는 식으로 파격적이면 좋겠다. 돌봄 간호사, 보육교사 같은 직업군이 저임금이라면 애정이 없는 포드주의식 돌봄만 하는 것이 맞다. 애정을 가진 돌봄을 원한다면 그 대가로 임금이 높아져야 한다. 의사만 늘리지 마라. 맞춤법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이등분하다', '삼등분하다'는 한 단어로 굳어져서 합성어로 쓰지만, 그 밖의 수는 '육 등분 하다'처럼 띄어 쓴다고 합니다. 맞춤법에 대한 국민참여대토론을 했으면 싶다. 검언합작 한동훈이 설계도와 작업시방서도 없이 외주를 주면서 시작된 부실착공 판사 누군가 그랬다. 한국에서 AI를 판사로 앉히면 안 된다고. AI가 못된 판례를 학습해서 재벌에게만 집행유예를 내린다고. 곱씹어 생각해도 그럴듯하다. 주택난 누군가 그랬다. 집도 인권이라고 생각하면 주택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맞는 말이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어디부터 좋은 사람이고 어디까지 나쁜 사람일까요. 정해진 검사법은 없지만, 법을 기준으로 따지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밤늦은 시간에 전봇대 옆에 노상방뇨를 하면 위법이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용서할만한 일입니다. 이런 행위도 행위자의 권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행위자의 권력이 높아질수록 영향력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성희롱 의혹을 남긴 채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성희롱 개념을 국내에 확산시킨 변호사가 성희롱 의혹으로 고인이 돼서 불편합니다. 고인이 좋은 사람을 넘어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랬지만 끝이 안 좋다고 다 안 좋은 것으로 끝나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의혹을 밝힐 순 없겠지만, 구조적 문제는 진상조사로 드러내고 고쳐야 합니다. 왜 이제 와서 폭로하느냐고 다그치지 마세요. 위계와 위력은 피해자들을 대항할 수 없게 만듭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혐오가 되어 2차 가해를 당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면 안 됩니다. 지지자는 무고라 주장하지만, 죽었다고 무죄는 아닙니다. 권력 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나게 합니다. 억눌렀거나 숨겼거나 아니면 새로 만든 영향력이 권력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경우는 나쁜 영향력입니다. 박원순의 선택은 스스로 자신을 유죄라고 말하는 방식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나는 이 말이 정확하게 이 사건을 대변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피해자 변호인의 과거 이력이나 대응 방법이 맘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인은 되살아날 수 없고 피해자는 심리적 파국을 강요당하며 존재 자체를 삭제당하니까 그렇습니다. 2차 가해자에게는 응징을, 피해자에게는 응원을 보냅니다.

무기계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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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oline Carter 영구적(永久的)이라는 말은 끝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영구적이라는 말은 영구적이라는 것인가, 영구적을 이등분했다는 것인가? 반영구적을 이등분하면 영구적인가, 영구적을 사등분했다는 것인가? 반영구적보다 작지만 영구적이 아니지는 않다. 그것을 다시 이등분해도 영구적이다. 영구적이라는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무기계약직(無期契約職)은 그렇지 않다. 무기직은 일정하게 정한 시기가 없다. 계약직은 기한이 정해져 있다. 무기계약직은 정년을 보장하되 급여는 계약직일 때 조건을 유지한다. 고용은 정규직을 따르고, 급여는 계약직을 따른다. 그렇다면 무기계약직은 무기직인가, 계약직인가? 다시 묻는다.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반영구적인 제품은 내구성이 연상되지만 무기계약직은 인간을 갈아 넣는 소모품이 떠오른다. 헌법을 포함한 대한민국 법률에는 노동자란 말이 없다. 근로자만 존재한다.

피라푸탕가, 열매를 따려고 뛰어오르는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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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C Earth 피라푸탕가(Piraputanga)라는 물고기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려고 뛰어오르는 모습입니다. 브라질 남부에 있는 보니토(Bonito) 마을 주변에는 아름다운 동굴이 많습니다. 특히 강은 아주 투명한 코발트 빛깔입니다. 강바닥에서 샘솟는 물이 석회암층을 통과하며 저절로 정화되기 때문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깨끗하고 투명한 강물입니다. 마을에 있는 광장의 중심에는 이곳 토종 물고기인 피라푸탕가를 형상화한 조형물 이 있습니다. 피라푸탕가는 작은 물고기, 과일, 꽃이나 곤충을 먹는 잡식성 물고기입니다. 피라푸탕가처럼 과일이나 씨앗을 먹는 물고기는 육지 동물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더 많은 씨앗을 배설합니다. 물고기가 퍼뜨리는 씨앗은 육지보다 싹이 틀 확률이 더 높습니다. 열매를 먹는 물고기가 없다면 나무는 멸종할지도 모릅니다. 보니토 마을에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피라푸탕가가 점프하는 모습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당신을 대신해 죽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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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이브 Dave 1993〉는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와 줄거리가 비슷합니다. 〈광해〉보다 더 행복하게 끝납니다. 두 영화를 같이 보면 네 배로 재미있습니다. 영화 중반쯤 햄버거를 만들어 먹다가 데이브(Kevin Kline)가 경호원 듀아안(Ving Rhames)에게 묻습니다. 데이브 : 대통령을 위해 총알도 대신 맞나요? 듀아안 : 그런데요? 데이브 : 정말이요? 대통령을 위해 목숨도 바쳐요? 듀아안 : 물론입니다. 데이브 : 그럼 날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겠네요. 듀아안 : ...... 경호원은 선뜻 대답을 안 합니다. 데이브가 훌륭하게 대역을 마치고 떠나기 전 마지막 악수를 하며 경호원이 말합니다. 듀아안 : 데이브? 데이브 : 왜요? 듀아안 : 당신을 대신해 죽을 수 있어요. 데이브 : 고마워요. 부통령이 정치를 시작한 계기에 감명받았던 데이브는 시의원에 도전합니다. 영화는 경호원이었던 듀아안이 데이브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최고의 장면입니다.

플라스틱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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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플라스틱입니다. 현대인의 일상에 필수적인 요소지만, 해마다 약 800만 톤에 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듭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1제곱킬로미터당 50만개 이상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를 떠다니기도 합니다. 밤마다 낚싯줄이 바다 곳곳에 드리워집니다. 그 줄을 다 연결하면 지구를 두 번 감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물은 상어처럼 장거리를 이동하는 동물들이 특히 위험합니다. 매년 수천만 마리의 상어가 사람들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향유고래가 플라스틱 양동이를 먹이인 줄 알고 먹으려 합니다. 인간의 활동이 바다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바다는 우리가 숨을 쉬는 산소를 생성하고 온도를 조절해주고 식량과 에너지도 제공하는데 말입니다.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이 바다를 서서히 죽이고 있습니다.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블루 플래닛 II Blue Planet II 2017〉 중 7부 바다의 미래를 위하여(Our Blue Planet)를 짜집기한 것입니다.

나는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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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부정한다 Denial 2016〉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영국의 재야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이 펭귄 출판사(Penguin Books)와 데버라 립스탯( Deborah E. Lipstadt )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시작합니다. 데버라 립스탯은 미국 역사학자로서 《홀로코스트 부정하기 Denying the Holocaust》를 영국의 펭귄 출판사에서 출간했습니다. 책은 1993년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었을 때는 호평과 함께 시선을 끌었지만, 이듬해 영국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그해 판매 부수가 2,088부에 불과했습니다. 1996년 7월 어빙은 출판물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영국 법정에 제소합니다. 미국에서 명예훼손소송은 원고 측에서 피고의 유죄를 입증해야 하지만, 영국은 반대로 피고가 원고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역사 왜곡을 한 어빙이 아니라 립스탯이 쓴 글이 진실임을 밝혀야 합니다. 재판은 시작도 하기 전에 어빙에게 유리한 형국이었습니다. '어빙이 전개한 논지의 핵심은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므로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따라서 자신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는 것' 1 이었습니다. 어빙이 이기면 영국 법정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공인하는 꼴이 됩니다. 변호인단은 '문서가 아닌 정황 증거들만으로는 홀로코스트를 증명할 수 없다는 어빙의 논리 그대로 어빙의 주장을 반박' 2 하여 어빙이 역사적 증거들을 왜곡하고 조작했다는 판결을 끌어냅니다. 공식적인 문서로 공격하는 어빙에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상처받게 하지 않으려고 직접 증언하겠다는 제안도 거절합니다. 영화는 '홀로코스트 수기 중 진짜는 작가가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다는 사실에 의존해 자신의 기억을 문서 자료와 대조하는 과정을 소홀히 하는 반면, 가짜는 그 과정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더 사실에

억압받는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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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감독 엘레노르 푸리아(Eléonore Pourriat)가 만든 11분짜리 단편 영화 〈 억압받는 다수 Majorité Opprimée 2010〉 중 한 장면입니다. 유모차를 미는 남성 옆으로 가슴을 노출한 여성이 지나쳐갑니다.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은 "일종의 미러링을 통해 성역할을 교란한 작품이다. 10분 정도의 짧막한 이야기 속에 일상의 젠더 문법을 반대로 뒤집어놓는다. (...)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단지 성별만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상황은 웃기고 어색해진다" 1 고 평했습니다. 11분의 상상이지만 여성은 평생을 겪는 일입니다. 〈억압받는 남성〉이라고 번역하면 더 직관적입니다. 이 영화를 중학교 도덕 수업 양성평등 교과 시간에 보여준 배이상헌 교사가 직위해제 처분 과 함께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됐습니다. 2019년 11월 13일 프랑스 중등교원노조(SNES-FSU)는 교사를 지지하는 성명서 를 냈고, 여러 시민단체가 지지성명과 연대를 하고 있습니다. 2019년 11월 14일 교육부는 배이상헌 교사가 광주시교육청을 상대로 제기한 직위해제 처분취소 청구를 기각 하며 광주시교육청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이 영화는 감독이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했고, 조회수가 1300만이 넘습니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Le Tout Nouveau Testament 2015〉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장면이 압권입니다. 임신한 남성에게 여성이 말합니다. 다리털 좀 깎아. 엘레노르 푸리아 감독은 교사가 직위해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편지 를 보내왔습니다. 부디,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춰주세요. 대신 차별과 싸우세요. 여성들을 희롱하는 것에 대항해 싸우세요. 여성을 향한 폭력과 성차별에 대항해 싸우세요. 강간의 문제와 싸우세요. 하지만 당신에게 성차별과 성희롱에 대한 정보를 주고자 했던 사람과 싸우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1. 이라영, 《 타락한 저항 》, 교유서가, 2019년, 164쪽 덧1. 20200

알바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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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트로스는 날개를 펼치면 3미터가 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가장 큰 새입니다. 날갯짓 한번 없이 수백 킬로미터를 활공하면서 지구를 횡단할 수 있습니다. 수명은 60년이고 한번 짝을 이루면 평생을 같이 살아갑니다. 하와이에 사는 사람들은 미드웨이섬을 '피헤마누(Phemanu)'라 부르는데 '우렁찬 새소리'라는 뜻입니다. 알바트로스는 이 섬에서 수백만 마리 새들과 함께 삽니다. 섬에는 천적이 없어 서로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알바트로스는 수년간 바다 위에서 살 때는 땅에 한 번도 내리지 않습니다. 수면에서 쉴 수도 있지만 일단 날아오르면 상공에서 몇 주간 지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땅을 밟지 않다가 완전히 자라면 출생지로 돌아와 짝을 찾아 알을 낳습니다. 한 마리는 알을 돌보고 한 마리는 먹이를 찾아 일주일 넘게 안 돌아오기도 합니다. 알바트로스는 먹이활동을 할 때 한 번에 1만 6,000킬로미터를 비행하기도 합니다. 먹잇감 중에는 플라스틱도 있습니다. 그게 새끼 뱃속으로 들어간다는 걸 알바트로스는 모릅니다. 양육을 끝낸 부모새들은 바다로 돌아갔고, 어린 새들은 이제 혼자입니다. 스스로 먹이활동을 하기 위한 첫 비행을 시작하기 전에 넘어야만 할 고비가 있습니다. 부모가 준 먹이 중에서 소화되지 않은 물질은 모두 토해내야 합니다. 하늘로 오르려면 자신의 몸속에 있는 건 모두 배출해야 합니다. 예전엔 토사물이 유기물질뿐이었습니다. 지금은 날카롭고 엉키고 유독한 물질이라 토해내기가 훨씬 더 힘겹습니다. 모두가 성공적으로 토해내는 건 아닙니다. 몸에서 플라스틱 조각을 꺼내야 자유를 얻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인간은 그 이유를 알지만 알바트로스는 그 이유를 모르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법학 박사이자 환경사진작가인 크리스 조던(Chris Jordan)이 만든 97분짜리 다큐멘터리 〈 알바트로스 Albatross 2017 〉를 짜집기한 것입니다.

방역은 잘했지만 박멸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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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총선이 범민주 세력의 역사적인 압승으로 끝났다. 4·3 전날 시작해 4·16 전날 끝난 당연한 결과다. 입법권력에 대한 지체된 탄핵이었다. 다음은 지극히 주관적인 지청구다. 1. 코로나 총선 코로나19로 시작해서 코로나19로 끝났다. 코로나19가 창궐하지 않았다면 기레기 언론은 연일 민주 세력을 헐뜯었을 것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재인 정부를 공격했다. 역병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다. 방역은 잘해야 본전이니까 선거를 앞두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총선 이슈를 버리고 코로나19로 물꼬를 돌렸다. 방역이 실패하길 기대하며 오보, 과장, 가짜뉴스로 도배를 했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방역을 잘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오르며 그대로 범민주 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2. 외신이 선거에 개입하다 총선을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몰아갔다. 모든 선거 이슈를 코로나19로 덮으며 방역이 실패하길 바랬을 것이다. 까대면 지지율이 추락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며 외신이 먼저 문재인 정부가 옳았음을 알아봤다. 이민족 정론지가 부상했고, 다음으로 폭망할 무리는 기레기가 득실대는 민족정론지다. 3. 호떡공천, 좀비공천 유권자는 무엇을 했는지 안다. 호떡공천을 넘어 좀비공천임을 알았다. 죽여도 살아났지만 인간이 아닌 좀비로 부활했다. 좀비는 죽여야 한다. 어차피 폭망할 것인데 공천 부실과 막말 때문에 대패했다며 위안을 삼는다. 선거판에서 누가 호구인지 모르겠으면 니가 바로 그 호구다. 4. 정의당의 패착 선거법을 개정한 취지는 좋았다. 저쪽이 비례정당을 만들었을 때 왼쪽은 정의당을 중심으로 비례정당 플랫폼으로 변신했어야 했다. 경쟁력 있는 소수 후보만 지역구에 출마하고 비례정당으로 뭉치며 지역구 후보도 단일화해야 했다. 다당제를 지향하는 선거법 개정이었는데 양당제를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초심을 잃은 정의당이 일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목소리는 더 다양해져야 한다. 5. 민심은 절묘하다 문프 지지율만큼 당선됐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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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란 꽁초 가득한 재떨이에서 장초를 고르는 일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어리석은 투표를 하려는가. 4년 만에 반성하는 척을 하는 저쪽은 다시 뻔뻔한 삶으로 돌아가고, 4년 만에 주인 대접을 받은 우리는 다시 개무시당하는 삶으로 복귀하려는가.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투표가 끝나면 노예가 되려는가. 누구에게 투표할지 결정할 때 후보 개개인보다 후보를 낸 정당을 주목하라. 저쪽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지양하고 있다. 저쪽은 이념이 만든 정당이 아니라 이익이 만든 정당이다. 저쪽은 모양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저쪽은 폭망하고 이쪽은 우호적인 반대 세력이 아주 많이 왼쪽에 와야 한다.

짜장면과 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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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짬뽕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짜장면은 어느 집이나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감칠맛이 있다. 짬뽕은 중국집마다 얼큰하고 매콤하게 개성 있다. 짜장면은 무시로 좋아하지만 술 마신 다음 날은 꼭 짬뽕을 찾는다. 요즘 더불어시민당과 열린우리당을 보면 그렇다. 더불어시민당은 짜장면 같고, 열린우리당은 짬뽕 같다. 더불어시민당은 감칠맛이 나지만 매콤하지 않고, 열린민주당은 화끈하지만 호불호가 나뉜다. 더불어시민당은 시민 후보와 민주 후보가 잘 버무려진 삼선짜장 같고, 열린민주당은 개검과 기레기를 아작 낼 정도로 얼얼한 매운짬뽕 같다. 나베는 물론 저쪽 성향 인간이 소고기를 사준다고 해도 안 먹은 지 오래다. 짜장면과 짬뽕을 놓고 즐거운 고민 중이다.

오스카는 로컬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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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카데미 92년 역사상 비영어권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건 처음이랍니다.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것도 1955년 미국 영화 「마티」 이후 두 번째이고요. "우리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스카가 선을 넘은 것 같다"고 한 배우 이선균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트로피를 오스카에서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다섯 개로 잘라서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수상 소감 도 영화만큼 위트 있습니다.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 언어는 영화입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 때 수상 소감은 명언입니다.

보수이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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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9일. 개표방송을 지켜보다 처참주 를 마셨다. 매주 같은 번호로 로또를 사다 딱 한 주를 건너뛰었는데 그 번호가 1등에 당첨됐을 때 느끼는 상실감의 백만 배가 밀려와서였다. 2020 총선 조감도 2012년 유세 당시 문재인 후보는 "정권교체와 새 정치를 갈망하는 모든 세력과 함께 국민정당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때 새누리당보다 먼저 민주당을 중심으로 헤쳐서 모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도 진보층부터 왼쪽을 아우르는 정당이 돼서 새누리당을 오른쪽 끝으로 밀어내길 바랐다. 사회당과 녹색당 또는 그 너머 정당의 출현이 당연해 보이는 밑바탕이 되길 기대해서였다.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공약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2019년 12월 27일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선거연령도 현행 19세에서 18세로 낮췄다. 문재인 후보는 대통령이 된 후 2018년 3월 26일에 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눈여겨본 대목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는 조항이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권력의 분산과 더불어 잘 다듬어지고 검증된 지방의회 의원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는 환경을 만들 것으로 보였다. 2020년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협치야말로 우리 정치에서 가장 큰 과제"라고 강조하며 야당과 협치내각을 하겠다고 밝혔다.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4+1 공조가 개혁법안을 통과시킨 동력이 된 점과 총선 후 구성될 21대 국회가 다당제로 예견되는 것이 배경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 후반기는 개혁 완성과 개헌 그리고 남북 협력 문제로 공조를 넘어 두터운 협치가 필요하다. 협치는 민주당과 연대 가능한 정당의 당선자가 개헌선을 위협하는 압승을 해야 가능하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은 범진보 정당과 협치내각을 구성해서 중도층에 넓게 자리를 잡으며 자칭 보수 정당들을 자연스레 오른쪽 끝으로 밀어내야 한다. 건전한 보수로 개과천선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상식도 미래도 기대할

살아서 돌아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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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서 돌아온 사람 김주대 조국, 당신은 인간이 만든 인간 최고의 악마조직과 용맹히 싸우다 만신창이가 되어 우리 곁으로 살아서 돌아왔다. 울지 마라, 이것은 인간의 역사, 기록이 사라진 이후까지 기록될 것이다. 당신의 온가족을 발가벗겨 정육점 고기처럼 걸어놓고 조롱하며 도륙하던 자들은 떠나지 않고 우리 곁에 있으므로 우리의 철저한 공격 목표가 되었다. 난도질 당한 당신의 살점과 피와 눈물이 만져진다. 죽음 같은 숨을 몰아쉬며 내민 손, 그 아픈 전리품을 들고 우리 전부가 백정의 심정으로 최전선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고, 노회찬 대표가 죽어서 간 길을 따라 당신은 절며절며 살아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몸 우선 옷부터 입어라. 밥부터 좀 먹어라 우리는 당신이라는 사람, 당신이라는 인류의 생존한 살과 체온을 안전하게 포위하였다. 누구도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건드릴 수 없이 되었다, 우선 잠부터 좀 자라.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당신을 불씨처럼 품은 우리는 오래전부터 사실 활화산이었다. 하루쯤 울어도 좋다, 내일의 내일까지가 우리 것이니까. 하루쯤 통곡해도 무관하다, 당신이 살아서 돌아왔으니까. 오늘까지는 당신의 생환이 좋아서 울자 당신 투블럭 머리카락 염색 빠진 끝부분 알뜰히 염색하고 샤워하고 상처투성이 심장도 수습하라, 내일은 우리가 백정의 심정으로 최전선이니까 조국, 당신이 살아서 돌아왔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 살아서 돌아왔다. 시인은 이렇게 밝혔다 . 내가 쓴 글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시라기보다 그냥 울분이었고 연민이었으며, 걱정과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였다. 많은 분들이 절망하고 아파할 때 다르게도 한번 생각해 보자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했다. 살아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됐다는 심정이었다. 이 글은 조국 개인을 넘어 ‘사람의 법’과 ‘사람의 언론’과 ‘사람이라는 대원칙’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팁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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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식당 종업원에게 팁을 주는 장면이 다반사로 보입니다. 시급과 팁을 받으면 짭짤할 것 같은데 생활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2000년 전후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등으로 위장 취업해서 워킹 푸어 계층의 현실을 책으로 쓴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의 《노동의 배신 Nickel and Dimed》에 이렇게 나옵니다. 공정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에 따르면 고용주는 식당 종업원처럼 '팁을 받는 피고용인'에게 시간당 2.13달러만 지급하면 된다. 하지만 2.13달러에 팁을 합한 금액이 최저 임금 미만이거나 시간당 5.15달러 미만일 때는 고용주가 그 차액을 채워 주어야 한다. (33쪽) 이렇게 받은 팁도 웨이터 보조나 접시닦이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수입은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당 7.5달러 정도 됩니다. 그러니 테이블에 앉아 사람을 부려먹고 팁을 조금만 주는 경우에는 당연히 불평하게 됩니다. 팁이 곧 임금이기 때문이지요. 최저임금에 모자란다고 종업원이 고용주에게 차액을 요구하기도 어렵고요. 아예 계산서에 "팁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Gratuity not included)"라는 글귀를 써놓기도 합니다. 알아서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고용주가 부담해야 할 노동자의 임금을 고객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지요. 유럽에서 건너온 팁 문화 뒤에는 저임금 노동과 사회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부작용이 숨어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팁을 줘야 할까요? 반드시 줘야 합니다. 팁은 봉사료가 아니라 서비스 노동자의 임금이기 때문입니다.

참회록

안철수를 보고 손뼉을 쳤던 오른쪽 눈을 손가락으로 찔렀습니다. 윤석열을 보고 손뼉을 쳤던 왼쪽 눈을 손가락으로 찔렀습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두 눈을 버렸습니다. 이제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양쪽 귀를 손가락이 틀어막지 못하게 손뼉 친 두 손도 자르렵니다. 두 눈과 두 손이 없는 병신입니다만 한가위 보름달이 뜬 조국(祖國)은 장관(壯觀)이란 건 압니다.

라죽 이야기

혼자 있을 때 아프면 슬픕니다. 입맛도 없지만 끼니를 때우려면 참 귀찮습니다. 죽이라도 먹고 싶은데 찬밥이랑 라면밖에 없으면 난감합니다. 이럴 때 라죽이 딱입니다. 라면 봉지를 뜯기 전에 잘게 부숩니다. 찬밥 반공기와 부순 라면을 냄비에 넣습니다. 수프 절반을 뿌려줍니다. 물을 간당간당하게 붓고 불을 지핍니다. 끓기 시작하면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줍니다. 물이 부족하면 조금씩 더 부으며 눌지 않게 저어주다 라면이 푹 익으면 라죽이 완성됐습니다. 싱거우면 수프나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됩니다. 양 조절에 실패해서 남으면 다음 끼니때 물을 조금 더 붓고 데워 먹어도 됩니다. 김치를 잘게 썰어 같이 끓이면 김치죽이 됩니다. 의외로 먹을만합니다. 라죽은 스무 살 때 처음 먹었습니다. 우럭회와 매운탕을 안주 삼아 술을 진탕 먹고 친구네 자취방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전날 동전 한 닢까지 털었던지라 나가서 사 먹을 형편이 되질 않았습니다. 친구는 밥솥을 열더니 남은 밥에 라면을 부숴 넣고 물을 붓더니 취사 버튼을 눌렀습니다. 김이 나자 솥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휘휘 젓고는 아침을 먹자고 합니다. 이런 걸 어떻게 먹느냐고 투덜대면서 한술 떴는데 맛있습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라죽이라고 하더군요. 밥솥을 바닥까지 허겁지겁 긁어먹었습니다. 삼십여 년이 지나도 첫 라죽 맛은 강렬해서 잊히지 않습니다. 음식은 추억으로 먹는다지요. 요즘도 그때 생각이 나서 가끔 멀쩡할 때 해먹기도 합니다. 그 친구가 어렵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보탠다고 티가 날 형편이 아니라 더 안쓰럽습니다. 아프지나 말길 빕니다. 훗날 라죽에 쐬주를 마시며 지금을 추억하는 시절이 바삐 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