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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라더니 '영웅'이라더니 - 의료현장의 민낯을 증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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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부는 의사 아이디를 쓰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현장에서는 처방이 없으면 업무가 돌아갈 수가 없다. 간호 업무만 하는 것도 벅찬데 의사 업무까지 더해져서 해결이 안 되면 다음 근무 간호사에게 업무가 전가된다. 생리식염수 처방하는 일이 하찮아서 바쁜 의사들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를 더 많이 뽑아서 의사 업무 부담을 줄여 주고, 간호사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26) 병동 교대근무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너무 많은 환자를 보는 것이다. 다행히 요즘 노동조합에서 근무조당 환자 숫자를 선진국 수준으로 간호사 1명이 환자 5명을 간호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사실 병동에서 10명 이상의 환자를 보다가 주말에 환자 퇴원으로 한 자릿수로만 줄어도 숨통이 트인다. 정말이지 근무조당 환자 수를 1대 5로 낮추는 것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 이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간호사노조를 방문해서 만난, 1대 5 근무를 하는 한인 간호사들의 행복한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근무 시간 중 가장 많이 하는 일이 환자와 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린 환자에게 친절한 설명은커녕 환자와 눈도 마주칠 시간이 없는데. 하루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41) 나는 병동에서 일하는 10년 차 간호사다.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일까?" 하며 기대하는 일반 직장인들과는 달리 "오늘은 과연 점심을 먹을 수 있을까?"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 달 20일 근무 중 5번 점심을 먹으면 성공한 달이다. 그나마 나의 점심시간을 줄여야 시간에 맞춰 간호를 제공할 수 있다. (49)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아플 수 있을 권리가 있고 가족에게 부담 주지 않을 권리가 있고 마음 편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 간병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 가족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나라에서 책임지고 풀어야 할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한다.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품위 있게 아프려면 말이...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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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동원하여―군사적 동원이든 민간인의 동원이든 둘 다든―정부를 강제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내는 것(17)'이다. 혁명은 '빈곤이나 불평등 같은 변화에 대한 불만이 쌓인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사회 질서가 여러 분야에서 닳아빠질 때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33)'이다. 혁명은 '통치자가 나약하고 고립되었을 때, 엘리트가 정부를 방어하기보다는 공격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여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다수의 연합된, 올바른 집단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할 때만(15)' 일어난다. 혁명이 일어나는 다섯 가지 조건이 있다. ①경제적 또는 재정적 압박 ②엘리트 사이에 소외와 대립이 커지는 것 ③불의에 대한 대중적 분노의 점진적 확산 ④설득력 있는 저항의 서사를 보여주는 이념의 공유 ⑤혁명적 변화에 우호적인 국제 환경이다. 혁명이 똑같은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지만 '중앙의 몰락(central collapse)과 주변의 약진(peripheral advance)(51)'이라는 패턴으로 진행된다. 최근에는 타협 혁명이라는 새로운 패턴이 등장했다. '반대파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정부 당국이 새로운 연합 정권에 반대파를 참여시키는 협상을 모색(54)'하는 것이다. 혁명은 '단순히 독재자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체제를 파괴하고 이를 보편적 권리와 피통치자의 동의에 기반한 새로운 입헌 정부로 대체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비롯한 이 혁명 모형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오늘날 혁명의 지배적 이상(理想)이 되었다(122)'. 혁명의 결과는 금세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 '혁명은 영웅주의뿐 아니라 공포(70)'라는 이름값으로 막대한 비용과 수천만 명이 희생된다. 혁명의 결과는 많고 다양하며 드러나는 시점도 제각각이지만, 혁명이 전개되어 '옛 체계가 무너지고 ...

아주 오래된 유죄 -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여성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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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싸움은 가끔 승리하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패배한다. 법정 싸움은 포기하지 않은 여성들의 최후의 싸움이고, 승리의 기약도 없이 긴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싸움이다. (11) 치마가 들춰지고, 마음대로 볼일도 못 보고, 남자아이들의 잘못으로 소문에 오르내려도 '행실 잘하라'며 오히려 혼나던 여자아이들이 자라나, 남자 사진을 촬영해 유포하거나 남자로부터 당한 일을 그대로 되갚자며 똑같이 하려고 하거나, 혹은 하고 있다. 이른바 '미러링'이다. 여자들이 미러링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내 눈에는 싫어하는 벌레가 온몸에 잔뜩 들러붙었는데 이를 떼어내지 못해 몸부림치는 고통으로 느껴진다. 내 눈에 미러링은 여성의 비명이다. (20)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유발한 남성의 성적 충동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이는 종종 피해자의 행실 책임론으로 귀결되어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형을 감면받거나, 심지어 무죄를 받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야한 옷을 입어서' '평소 행실이 방정하지 못해서' '남성과 데이트를 즐기며 성관계를 허락한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등 여성이 남성의 성적 충동을 유발해 성범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33)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희롱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2, 3차 가해는 당연한 부록이며, 결국에는 피해자 자신이 직장과 공동체에서 손가락질받고 쫓겨날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50)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은 어느새 성적 자기결정권, 즉 '자발'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아이들을 공격한다. 성인 남성의 성착취에 대해 법과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관대한가. 성인 남성의 성범죄 대상이 성인 여성인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피해자가 아동이라고 해도 처벌의 관대함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 (64) 능욕당한 여성들을 ...

강민영, 식물 상점으로 전력 질주하길 바라지 않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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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것들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식물들은 사람이나 동물처럼 발이 달리지 않아서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그 대신 어느 땅에 내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는 존재들"입니다. "나고 자라는 장소는 복불복일지언정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고, 재해를 만나더라도 말없이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식물은 여성과 닮았습니다. 유희는 "사람도 식물처럼 다듬으면 나을 수 있다고, 조금 손보면 더 옳은 방향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그 믿음은 유희를 거쳐 간 남자들 때문에 깨졌고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습니다. 유희는 주황과 초록으로 색칠한 당근 모양의 물뿌리개를 들고 마당에 서서 자신이 밟고 있는 땅바닥을 한참 내려다봤다. 끊임없이 여자를 괴롭히던 남자들.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굵은 선이 머리 위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자기 감정을 의도적으로 표출하는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어쩌다 그들과 엮인 여자들에게서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결국 시발점을 찾아 말끔하게 지워야 했다. 유희는 그동안 '식물, 상점'을 거쳐 간 여자들을 떠올렸다. 유희는 죽여주는 식물 상점을 운영합니다. 세상에 쓸데없는 것들을 잡아줍니다. 체육을 싫어했던 허진은 의사의 권유로 수영에 입문했습니다. 지금은 바다 수영이 마지막 목표일 정도로 동호회 사람들 사이에 타고났다는 말을 듣습니다. 바닷가가 고향인 김설은 수영은 젬병이지만 어릴 때부터 달리기가 좋았습니다. 단 한 번도 달리기가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둘은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맞닥뜨린 재난 상황에서 서로 도우며 생존했습니다. 허진과 김설은 "갑자기 재앙과 재난이 도래한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님을, 손과 등을 잡아 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누군가 있음을 실감하며 안심하고 한 발 가까스로 내딛"으며 생존을 위해 전력 질주했습니다. 초코라는 강아지와 함께. ...

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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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개인의 사고를 그토록 붙들어 맨 일본의 국가권력은 놀랍다. 그것도 장구하게 유지해왔다는 것이 더욱 놀랍고 유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기능과 세기가 우수하면서도 일본은 항상 남의 틀과 본을 훔쳐오거나 얻어 와서 갈고 닦고 할밖에 없었다. 본과 틀이 없는 나라, 그들의 정치이념은 창조의 활력이 위축된 민족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날조된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피해받은 국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고 고래심줄 같은 몰염치는 그것을 시정하지 않은 채 뻗치고 있는 것이다. (29) 통곡이 없는 민족, 울지 않는 민족, 왜 울지 않을까? 슬픔도 마치 실루엣같이 소리가 없다. 너무나 정적이다. 본시부터 그러했을까? 그들이라고 울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로 상징되는 그들의 역사 탓일 것이다. 사실 일본이 이웃에 끼친 피해의 규모가 크고 참혹함도 자심한 것이었지만 그들 스스로, 동족들 목줄기에 들이댄 칼의 세월이 훨씬 길다. 그리고 그 참혹함도 타민족에 대한 것에 못지않았다. (49)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말 중에 '스고이! 凄い '라는 것이 있다. 우리네의 굉장하다는 말과 같이 일종의 감탄사인데 크고 훌륭하다는 뜻의 굉장과 오싹하게 소름 끼친다는 뜻의 스고이, 일본도 日本刀 의 푸른 칼날의 번뜩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 (56) 옛날 일본은 아시아에서 고도 孤島 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고아 같은 존재였다. 기능적이며 공리적인 특성은 차라리 서쪽에 가깝다. 그리고 일본은 서쪽을 등에 업고 동쪽을 배신한 유일한 나라다. (77) 진리는 아름답고 선하다 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진리이며 선하다. 선한 것은 진리이며 아름답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 문학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는 갇혀버린 사회에서 도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선함도 진실함도 결여되어 있고 오히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농후합니다. (102) 나는 젊은 사람에게 더러 충고를 한다. " ...

H마트에서 울다, 한국 음식으로 시부저기 이어진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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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은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H마트에만 가면 웁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은 어머니에게서 한국 음식 문화를 접했습니다. 어머니가 암 투병으로 돌아가신 후 사 먹던 김이 어디 거였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여전히 한국인인지 의문이 듭니다. 미셸은 지난 5년 사이 이모와 엄마를 암으로 잃었습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려고 H마트에 갑니다. 청소년기에 미셸은 또래 사이에 섞이려고 애쓰며 지냈고, 소속을 증명하려고 느끼면서 성인이 됐습니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습니다. 반만 인정받고 반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엄마에게서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소리도 들으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엄마는 휴가 여행을 다녀오며 사 온 카우보이 부츠를 일주일 동안 신고 다니며 길들여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미셸이 처음 신을 때 발이 까이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장례식이 끝나고 투병 생활 중 엄마가 드셨던 음식 중 잣죽을 만들었습니다. 요리법은 간단했지만 시간이 걸리는 요리였습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요리가 아니라 담백한 잣죽이 진짜로 원하는 요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국 이모 집에서는 마침 생일이어서 이모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하는 의미에서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전통이 있는데 새로운 의미가 생겼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마치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핏줄(blood ties)이었습니다. 미셸이 처음 한 말은 엄마라는 한국말입니다. 그다음엔 맘(mom). 엄마를 두 가지 언어로 부르기 시작하며 엄마만큼 날 사랑해 준 사람은 없었다...

베른트 하인리히, 홀로 숲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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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동식물 연구가이자 과학자이지만 나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다. 내가 어떤 일을 꿈꾸고 원하든 간에, 결국 내가 하는 일이 곧 나 자신이다. 지난 25년 동안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숲으로 가는 것이다. (6) 우리의 목적지는 메인 주 서쪽에 있는 애덤스 힐이다. 한때는 농장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내가 거주할 작은 터를 제외하고 전부 숲으로 바뀌었다. (18) 메인 주 이쪽 부근의 삶은 나무와 숲을 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나무를 땔감으로 쓰고 어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나무를 잘라낸다. 많은 사람들이 종이, 터보건, 설상화, 사과 박스, 카누를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한다. 이 모든 것이 나무로부터 나온다. 나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생명줄인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용도가 다른 두 개의 나무가 있는 것이다. 나무는 목재 wood 가 되기도 하고 숲 woods 을 이루기도 한다. (41) 우리 인간은 곤충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우리 또한 의미도 모른 채 살아남기 위해서 무작정 하고 있는 일들이 많지 않을까? (93) 나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매료되었고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주변의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잠길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아주 가까우면서도 영원한 느낌으로 포개지는 것 같았고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마치 큰까마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156) 진화는 무엇인가를 '덤'으로 만들지 않는다(가끔 우연히 그런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왜냐하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데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162) 다람쥐는 어디에다 구멍을 냈는지 기억하고 따뜻하고 해가 잘 드는 날을 기다렸다가 짠-하고 메이플 시럽을 마신다. 나는 다람쥐가 나무에서 나무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녀석은 구멍을 뚫어놓은 나무-오직 그 나무에만-로 바로 올라갔다. 나중에 나도 다람쥐...

사람, 장소,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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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26)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31) 태아, 노예, 군인, 그리고 사형수의 예는 사람의 개념에 내포된 인정의 차원을 드러낸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실종자의 예에서 보았듯이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의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동어반복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57)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다. (58)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짓고, 사회 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그러므로 신분의 개념은 인정투쟁이나 타자화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42) 우리...

헌책방 기담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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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찾는 사연을 수수료로 받고 절판된 책을 찾아주는 헌책방 주인이 있습니다. 사연을 들려주면 책을 찾아주지만, 헌책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나타나곤 합니다. 젊은 시절에 연애편지를 쓰려고 샀던 책을 찾아 달라는 어떤 어르신의 사연이 계기가 됐습니다. 어르신은 사람을 찾는 건 의미가 없으니 연애편지를 쓸 때 도움을 받았던 책을 찾고 있었습니다. 찾고 있던 책은 인연처럼 반년이 지나 나타났습니다. 어르신은 책값보다 더 비싼 차비를 들여 책을 찾으러 왔습니다. '책은 작가가 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책을 찾는 사람들은 거기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23)'을 만듭니다. '책은 다 같은 책이지만 꼭 만나야 하는 그때의 책'에는 '젊은 날의 추억, 사랑, 고민, 그리고 망설임과 선택을 고스란히 담고(32)' 있었습니다. 한동네에서 살며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에 다녔고 결혼까지 한 부부는 어릴 때 읽었던 책을 찾고 싶답니다.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책을 찾아서 태어날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책은 아이가 태어나고도 한참 지난 뒤에야 전해줬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보여주자 아이는 내용은 물론 사연까지 다 아는 것처럼 책을 잡으려 했습니다. 하룻밤 만에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을 마저 읽는 데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사연도 있습니다. '어떤 책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71)' 합니다. '해 질 녘 서해를 닮은 그림처럼(81)' 한없이 쓸쓸한 풍경에 이야기가 담긴 그림엽서를 건네던 이도 있었습니다. '가장 아끼는 것은 책이 아니라 하나뿐인 손녀(105)'일지도 모르는 어떤 노인도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름다운 한 사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수만 권의 책으로 가득 한 서재와 바꿀 만큼 소중(106)'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

완전사회, 인류의 완전한 미래는 여인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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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미래로의 수면 여행'을 계획한다. 지성인이며 완전한 신체를 가진 '완전인간'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우선구는 전 세계에서 딱 한 명인 완전인간으로 선발된다. 남태평양에 있는 비커츠섬에 미래로의 수면 여행을 위한 보금자리가 만들어졌다. 우선구는 비커츠섬에 마련된 기밀실의 수면 장치에 누웠다. 기밀실 벽의 원자시계가 완전인간의 수면 시간을 기록하려고 움직였다. 누가 몸을 흔들었다. 우선구는 기분 좋게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우선구가 침대에 올라갈 때를 0으로 시작한 비커츠섬 원자시계는 161이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선구는 161년을 자다 깨어난 것이다. 2155년. 유엔이 계획한 미래로의 수면 여행은 성공했다. 우선구가 잠들어 있는 동안 세계는 급변했다. 비커츠섬 시간으로 9년 7월 20일, 제3차세계대전이 폭발했다. 핵무기로 교전을 한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죽었고, 살아남은 지역도 방사진으로 불행한 종말을 기다리는 날들이었다. 23년 4월 14일, 원자탄 피해 복구 방식을 발견하였다. 핵폭발 지역이 속속 복구되었다. 32년. 핵무기의 대량 투입으로 시작한 제4차세계대전은 기상작전(氣象作戰)과 독기류, 독가스, 독세균 작전으로 2년 이상을 끌었다. 3차대전을 겪고 살아남은 6억 인구가 11억까지 불어났지만, 이제 9천만 명도 못 되게 살아남았다. 온 세상은 사막이 되었고 독약으로 넘쳤다. 무기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과학자들은 대오각성하고 세계과학자연맹을 만들었다. 과학자들은 곳곳에 과학센터를 만들어 전 세계 인민들을 돕고 부흥 사업을 시작했다. 과학센터가 설립된 지 2년 만에 전 인류에게 충분한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자 파벌이 다시 싹트고 정치인이 등장했다. 과학자들은 모든 정치성을 외면하고 숙청을 단행하였다. 과거의 뼈아픈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과학센터가 전 세계 의식주의 생산과 관리를 쥐게 되자 스스로가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위대한 탐험의 숨은 영웅 톰 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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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월 4일. 여덟 명의 대원은 마지막으로 악수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스콧이 어젯밤에 팀을 다시 꾸리기로 하고 테디 에반스, 래실리, 크린에게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라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크린은 지난 두 달 동안 노력했음에도 남극점을 밟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스콧, 윌슨, 보워스, 오츠, 태프 에반스가 살아서 이동하는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았다. 크린, 래실리, 에반스는 베이스캠프까지 1206킬로미터를 되돌아가야 했다. 네 명이 해야 할 일을 셋이 하며 남극점을 정복하고 돌아올 대원들을 위해 식량과 연료의 4분의 1을 저장소마다 남겨두고 가야 했다. 더군다나 테디 에반스만 유일하게 방향을 찾는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에반스는 괴혈병 초기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180킬로그램의 짐을 실은 썰매를 끌며 나아갔다. 기온은 섭씨 영하 29도까지 내려갔고, 바람이 '얼어붙은 바늘 끝으로 뺨을 찌르는 것처럼' 얼굴을 후려쳤다. 1월 17일. 스콧은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아문센의 탐험대가 한 달쯤 전에 먼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셋은 크레바스가 숨어 있는 미로와 같은 벌판을 계속해서 나아갔다. 1월 21일 늦게 빙하 하부 저장소에 도착했다. 장장 1770킬로미터 동안 썰매를 끌어온 에반스가 괴혈병 증세를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뒤에는 래실리가 현기증을 느꼈고, 크린도 설사하기 시작했다. 에반스 곶까지는 640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1월 25일. 세 사람이 로스 빙붕의 평평한 얼음 벌판 위에서 썰매를 끌고 이동할 때, 아문센은 3000킬로미터, 99일의 남극 탐험을 마치고 프라하임 기지에 도착했다. 에반스의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었다. 셋이 끌던 썰매를 둘이 끌어야 했고, 에반스가 방향을 찾지 못할까 걱정이 컸다. 무거운 썰매를 끌던 두 사람은 2월 11일에 필요 없는 장비들을 모두 버려 무게를 줄였다. 헛포인트까지 160킬로미터 정도 남았을 때 에반스가 일어설 수 없게 되어 썰매에 묶어야 했다. 에반스...

여행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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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16)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18)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24) 어쨌든 내 첫 해외여행은 그렇게 키미테를 귀 뒤에 붙인 채로 시작되었다. (35)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57) 모든 기억은 과거를 편집한다. (71)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92)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109)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

가족을 구성할 권리 -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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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가족문제가 공적인 영역과 분리되는 가족 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과 연결된 사회적인 의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활발한 가족변동 상황은 가족구성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직 많은 이에게 낯선 개념일 가족구성권은 말 그대로 '가족관계를 구성할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중요할까? 우선, 가족구성권의 보다 상세한 정의를 보자.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가족구성권을 "다양한 가족의 차별 해소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한다. 이는 즉, 가족과 가족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 또한 평등하게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7) 가족을 정치화하는 가족구성권은 단순히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관계들을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앞서 가족구성권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 가족구성권은 근본적으로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갈래의 복합적인 차별 해소에 대한 접근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상상해오고 권장해온 ‘가족’의 의미와 가족모델은 무엇인지,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 가정되고 상상되는 이들의 모습과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제도가 어떻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지 등 여러 갈래의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서의 삶과 자격이 부여되는 데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8)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퀴어, 장애인, 비혼여성, 싱글맘, 빈민 등 '이상적이지 않은 시민'들은 곧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이들로도 간주되며, 이들은 말 그대로 '뒤처진 존재'이자 보이지 않게 가려져야 하는 ...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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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까딴의 어원은 다양하지만 인디오들이 원래 어떻게 불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마야는 남부, 중부, 북부 지방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까딴반도는 북부 지방에 해당한다. 유까딴은 멕시코의 동남쪽에 있는 반도로 총면적이 180,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한반도 면적의 2/3 정도 되는 커다란 반도이다. 유까딴은 산이 없는 열대 평원 지역으로 거의 모든 곳에서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곳 사람들은 장수하는데, 140세에 이르는 노인도 있었다. 현재 사용하는 '마야'라는 용어는 최대한 넓게 보았을 때 유까딴반도의 상당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 정복 시기 이전에는 하나의 대명사로 쓰인 적은 없다. 유까딴에는 무척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이 있었지만, 금들이 가득하다는 사실무근의 소문이 퍼졌다. 이로 인하여 탐욕에 눈이 먼 에스빠냐 사람들이 유까딴으로 향하게 되었고 정복의 역사가 시작됐다. 마야 사람들의 주식은 옥수수였다. 옥수수로 다양한 음식과 음료를 만들었다. 외상 거래가 이루어졌고, 폭리를 취하지 않는 등 상거래 예의가 잘 지켜졌다. 수확한 농작물을 보관하는 훌륭한 곡물창고도 있었다. 유까딴 사람들은 매우 관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무척 환대해서 낮에는 음료를 대접하고 밤에는 음식을 대접했다. 마야인들은 0의 개념을 알았고 20진법을 사용했다. 마야 사람들은 천체 관측에 있어서 당대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과학적인 결과를 내고 있었다. 밤에 시간을 알기 위하여 금성과 염소자리, 쌍둥이자리를 활용했고, 발달된 천문학 지식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인 달력 체계를 만들었다. 마야는 지금의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세,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지역에 빼곡히 도시를 세우며 번성했다. 디에고 데 란다는 16세기 에스빠냐의 신부로 초기 식민지 시대에 멕시코로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 인연을 맺었다. 란다는 원주민들과 지내며 교류했지만, 그들의 인신공양과 우상숭배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원주민을 이교도로 ...

라마와의 랑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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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0년 무렵, 행성연합은 수성, 지구, 달, 화성, 가니메데, 타이탄, 트리톤으로 구성됐지만 행성보다 위성이 더 많아 시끄럽습니다. 일곱 멤버가 각각 거느리고 있는 위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성연합의 본부와 회의장은 지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달에 있습니다. 우주 파수대는 거대한 운석이 지구의 방호망을 뚫을 수 없도록 새로운 소행성들을 찾아내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소행성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형식적으로 31/439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큰 소행성으로 밝혀지자 힌두의 신전에서 빌려와 이름을 짓게 됐습니다. 31/429는 '라마'가 되었습니다. 탐사위성이 1만 킬로미터 밖에서 찍은 영상에는 회전하는 원통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50킬로미터 높이의 원기둥으로 지름이 20킬로미터에 이르는 보일러 통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인데버호는 수명이 다 된 행성 추적 신호기를 확인하여 회수하거나 다시 설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라마와 랑데부를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인데버호가 겨우 따라잡았을 때 라마는 이미 금성의 궤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인데버호 선장인 노턴과 선원들은 40일 뒤면 근일점에 다다라서 태양을 스쳐 지나게 될 라마의 표면에 착륙하여 탐사를 시작합니다. 소설은 해답을 구하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소설입니다. 라마에 처음 들어가려고 문을 열 때부터 시작합니다. 노턴 선장은 무의식적으로 지구와 같은 방향으로 장치를 돌리지만 꿈쩍도 하지 않자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엽니다. 행성연합이나 라마 위원회는 의견이 둘로 나뉩니다. 라마는 '3의 여분을 갖는 미학'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3중의 3중 형태를 가진 구조물도 있습니다. 라마의 추진 동력은 뉴턴의 제3법칙을 무시하고 태양의 가장자리를 스치며 아련히 빛나는 우주의 한구석으로 날아갔습니다. 탐사한다며 내부를 휘젓고 다닌 노턴과 선원들은 물론 수소폭탄을 쏜 지구인들에게 해코지는커녕 일언반구도 없이...

강뉴 -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한국전쟁 참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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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유엔군 참전을 결정했습니다.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1950년 8월에 황실 근위대를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로 파병부대를 창설했습니다. 훈련받은 파병부대 장병들이 1951년 4월 12일 황제로부터 '강뉴부대'라는 명칭과 부대기를 하사받았습니다. '강뉴(Kagnew)'는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이며 또 하나는 '초전 박살'입니다. 4월 13일 강뉴부대는 지부티로 이동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1951년 5월 7일, 강뉴부대는 1만 4500킬로미터를 달려와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현지 적응훈련을 한 후 미군 제4군단 제7사단 32연대 4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전사들에게 닥친 시련은 한국의 혹독한 추위였습니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찬바람은 적군보다 더 위협적이었습니다. 강뉴부대 제2진은 21일 동안의 항해 끝에 1952년 3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제1진 강뉴부대와 교대를 했습니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1953년 4월 5일부터 1954년 7월 10일까지 제3진, 1954년 7월 10일부터 1955년 7월 9일까지 제4진을 파병했습니다. 강뉴부대 제4진은 전쟁고아가 많은 고아원을 특별히 돌봤습니다. 6.25전쟁 당시 유엔이 요구하는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입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콜롬비아, 남아공화국 그리고 에티오피아입니다.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대 6,037명을 한국전쟁에 파병했습니다. 강뉴부대(Kagnew Battalions)는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승리했고,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강뉴부대는 전우의 시신도 모두 수습해 돌아가 부산 유엔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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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는 광범위하게 탈이데올로기화했다'라는 생각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중도 쪽으로 떠밀려 간 정당은 더 이상 아무런 사상도 없고, 거대한 목표도 추구하지 않는 듯하다. 정당이 선거 유세 때 내세우는 구호는 세련됐지만 가벼워보인다. (...) 탈이데올로기화의 핵심은 예전에는 좌파가 어렵고 복잡한 이론을 다룬 논문에 엄청난 흥미를 가졌으며 벽돌 두께만한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런 위대한 논쟁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 이렇게 '느낌의 좌파'는 자신이 무엇에 반대하는지만 잘 알고, 무엇을 찬성하는지는 좀처럼 표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탈이데올로기화 때문이라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지난날 좌파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지만, 오늘날 좌파에게 이 모든 확신은 산산조각 났다. (8) 좀 더 좌경이면서 정치적으로 확실한 좌파, 중도에 있는 보통 사람들, 왼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좌파'에 속한다. 좌파는 이렇게 다채롭고 이질적이다. (16) 오늘날 일부 경제학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학파가 마르크스를 인류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마르크스가 끼친 공로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다르게 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역학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독을 막을 수 있는 면역 체계와도 같습니다. 다음 같은 사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부는 사적으로 생산된 뒤 거의 불법이나 다름없는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에 의해 강탈당한다'라는 주장에 너무 쉽게 빠져듭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공부한다면 사실은 정반대라는 점, 즉 '부는 공동으로 생산된 뒤 생산관계와 소유권을 근거로 사적으로 취득된다'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그런 생각에 빠...

알렉스 캘리니코스 시사논평 - 양극화, 극우,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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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당선은 엄청난 희망을 불러일으킨 특별한 사건이었다. 임기 시작부터 오바마는 그 희망을 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경 우파 경향인 티파티 운동이 오바마에 맞서 들고일어났다. 지금 티파티와 유사한 언행을 하는 후보[트럼프]가 오바마의 후임자로 취임하려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난 데는 오바마의 책임도 명백히 있다. (33) 2016년에 벌어진 두 충격적 사건(브렉시트 국민투표와 트럼프 당선)과 마찬가지로 2020년 미국 대선은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구축한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헤게모니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또다시 보여 준다. 그 헤게모니는 2007~2009년 전 세계 금융 위기와 그 후폭풍 동안 불만을 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일자리와 집을 잃고, 소득이 줄고, 공공서비스가 삭감되면서 거대한 분노가 쌓였다.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의 브렉시트 추진과 마찬가지로 트럼프와 공화당의 성공은 정치체제를 대자본의 이해관계에서 어긋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실패한 국가"가 될지 모른다고 말하는 크루그먼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 두려움은 과장일 수 있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미국 제국주의는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려 할 것이고, 군사·금융에서 미국이 가진 힘을 전 세계에 뽐낼 것이다. (59) '죽음에 맞선 삶'이란 이윤에 맞선 삶인 것이다. 살아생전 자본주의가 죽음을 거래하는 체제임을 이토록 생생하게 목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언제나 그랬다. 초기 자본주의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에 의존하지 않았던가. 이제 이 체제는 이 세상에 남은 야생 생태계를 침범해서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 조건을 만들고 그 대가를 노동계급이, 많은 경우 목숨으로 치르게 하고 있다. 이에 맞선 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이자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193) 자본주의는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는 체제다. 자본가들은 생존하려면 ...

어디에도 없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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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남자가 사진을 내밀며 알아보겠냐고 물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새미 웬트입니다. 이건 새미의 두 번째 생일날 찍은 사진이에요. 3일 뒤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뒤이어 말했다. "이 아이는 1990년 4월 3일에 사라졌습니다. 저는 당신이 새미 웬트를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새미 웬트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호주 멜버른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는 킴벌리 리미에게 제임스 핀이라는 생판 만난 적도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킴벌리가 28년 전에 납치돼 사라졌던 세미 웬트라고 했다. 그날 밤 킴벌리는 온몸이 그림자인 키 큰 남자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남자는 소멸 이론에 대해 말하며 서류 뭉치를 보여줬다. 소멸 이론이란 기억이 형성될 때 뇌에 남겨진 흔적은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기억을 오래 꺼내보지 않으면 그 기억은 뇌 속을 떠다닌다고 한다. 제임스는 결정적 증거라며 DNA 검사 결과를 내밀었다. 킴벌리와 제임스가 형제일 가능성이 98.4퍼센트였다. 그의 진짜 이름은 스튜어트 웬트라고 밝혔다. 킴벌리는 이건 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빠에게 말하자 불쾌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아빠는 알고 있었다. 결국 킴벌리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조수석 시트에 엉덩이 자국이 또렷하게 남을 만큼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된다. 온전한 킴벌리 리미도, 온전한 세미 웬트도 아닌, 중간 어디쯤의 이도 저도 아닌 사람처럼 될 때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소설은 무명의 작가를 단박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며 스릴러 독자에게 '숨막히게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종교, 가족, 사랑, 성소수자, 유괴, 기억 등등이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며 조금씩 사실을 향해 간다. 실타래를 다 풀 때쯤에 마주친 진실은 너무나 뜻밖이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

어쩌다 유교걸 - 어느 페미니스트의 동양 고전 덕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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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맹자 왈을 공부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여자가 아니라 유교를 공부하는 여자, 노브라로 앞가슴이 훤히 트인 티셔츠를 입고 《논어》를 들고 다니는 여자, 또래 친구들이 스토킹 범죄로 스러져가는 걸 보고 분노하면서 음양을 공부하는 여자, 고리타분한 건 딱 질색이라면서 고전 텍스트를 읽는 여자,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禮)에 대해 말하는 여자(8)'입니다. 스스로 '유교걸'이라고 합니다. '유교 같은 것에 진절머리 내던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인 유교걸이 되기까지 20대 중 절반의 시간이 필요(22)'했습니다. 저자는 대학을 그만두고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유교를 공부합니다. 《열녀전》이 열녀문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열전(列傳)'과 같이 어떤 이야기가 줄지어 있다는 뜻의 '열(列)' 자를 쓰는 《열녀전》은 '옛 여성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걸 지금 알았습니다. 저자는 '《열녀전》을 읽으며 나의 페미니스트 자아와 유교 자아가 경계를 풀고 화해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43)'이 들었다고 합니다. 공부할수록 夫婦有別 長幼有序(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처럼 불편했던 문장들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여성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유교의 '구별'과 '차례'는 서로가 서로의 가능성을 믿고 의지하면서, 각자 다른 역할을 수행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67)'하며 유교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학파라는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어려서부터 계절을 즐길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나는 아마 비구니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 내내 나는 대통령이나 변호사를 꿈꾸는 진취적인 여자였다. 사주상 나의 캐릭터는 갑목(甲木)이라던데, 이것이 나의 타고난 성정을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한다. 갑목은 큰 느티나무와 같아서 성장하는 힘이 강하고 위로 뻗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