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이후의 세계
이 책은 '공정'에 관한 책이 아니다. 나는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어서 이 책을 집필했다.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사실 좀 답답하다고 느껴왔던 것은 아닐까? 꽤 오랫동안 '공정'을 주제로 한 대동소이한 글들이 뻔한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이건 공정하지 않아!"라고 누군가가 외치면, 다른 의제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공정한가, 불공정한가"를 따지게 되어버렸다. 정치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모든 말들을 '공정'으로 포장했고, 선거 때마다 후보들은 앞다투어 '공정'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마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공정' 단 하나뿐인 것처럼. 하지만 이 지나친 떠들썩함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요란한 약속들이 내 삶을 바꾼 것은 없었으니까. (5) 모두가 공정한, 즉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따라서 내가 부당하게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는(다시 말해, 똑같이 보상받거나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신념은 각자도생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삶의 방식을 정당화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공정성 모델은 구조적·역사적 불평등을 무화시키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의 효과를 지워버리는 원자화 atomization 모델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원한다"는 외침은 결국 "성공하고 싶으면 노력해라" "네가 가난한 것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어쩌면 동전의 양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온전한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외면하게 만든다. 모든 개인은 노력을 통해 성취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