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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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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하루는 다른 곳의 하루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다. 서울의 일 제곱킬로미터는 다른 곳의 일 제곱킬로미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옮겨 다녀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공간이다. (29) 상품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생존의 그물망 속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을 가져다주며, 참으로 잔인한 일이지만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우월감도 가져다준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들어갈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네트워크에는 이러한 특성이 있다. 그 네트워크는 실제로 베풀어 주는 것 이상으로 네트워크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 자체를 통해 일종의 환상적 만족감이나 편익을 준다. 물신(fetish)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34) 일반적으로 '낮은' 질의 여가는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대량 생산품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높은' 질의 여가는 표준화·규격화되지 않은 고객 맞춤형 제품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9) 자본주의사회에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누구나 질 좋은 노동력을 만들어내고 그 질 좋음을 시장에서 인정받아야 먹고살 수 있다. (...) 노동력 재생산이 결국 점점 더 자본이 짜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이기도 하다. (51) 우리와 그들의 구별 짓기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상대를 압도하는 '성전'의 하드웨어,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 함부로 진입할 수 없는 사회적 네트워크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간 구조는 고급 아파트나 쇼핑몰, 놀이동산, 심지어는 패키지여행의 그것과 닮아 있다. 디즈니랜드에는 미국이 없고 코엑스몰에는 서울이 없듯이, 교회에는 기독교가 없는 것이다. (133) 렌트의 기본적 형태인 임대료나 그것이 한국적으로 변형된 권리금은 강남이나 강북을 가릴 것 없이 지주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

시인의 말 - 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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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여 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악의 평범성/이산하/창비 20210205 148쪽 9,000원 28살 무렵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적의 심장부에 두번째 폭탄을 던지는 심정으로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썼다. 1 모난 돌과 바위에 부딪혀 다치는 것보다 같은 물에 생채기 나는 게 더 두려워 강물은 저토록 돌고 도는 것이다. 2 누구나 그렇듯 상처 준 것들보다 상처 받은 것들을 먼저 기억했다. 3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4 우리 시대의 꿈은 90%가 자본의 덫이다. 5 죽은 자 여럿이 산 자 하나를 따라가고 있다. 6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7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8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9 촛불을 삼킨 스타 괴물들이 지상을 배회하고 있다. 10 낡은 것이 갔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 그 순간이 위기다. 11 그러니 심지 없는 촛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기극권자들을 위해 적당하게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난 촛불이 타오를수록 더욱 슬프다. 12 자본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한 사람이 쪽박이고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열 사람이 쪽박이다. 13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문정인의 미래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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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박사는) 미국의 전략을 서양장기(체스)에, 중국의 전략을 바둑에 비유했다. 미국은 체스를 두듯이 상대방의 왕(중국 공산당 정권)만 무너뜨리면 승리할 수 있다는 단기 속도전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중국은 바둑처럼 장기적 포석에 따른 세 싸움을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단기적 전투에서 지더라도 장기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서양 장기에서는 제로섬 형태의 승패가 분명하지만, 바둑에서는 공존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추론을 편다. (259) 국제정치의 대가이자 현실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한스 모겐소 교수는 "2000년 이상 한반도의 운명은 한반도를 통제하는 패권국의 지배력이나 그 통제를 위해 경쟁하는 강대국들 간의 세력균형에 의해 결정됐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사실이 그러하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중국 패권 아래 있다가 19세기 말~20세기 초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 패권 아래에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경쟁 속에서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그리고 미소 냉전 구도에서 한국은 패권국 미국의 세력권에 속했다. 강대국 결정론과 진영 외교의 불가피성은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나왔다. (285) 미중 신냉전 시대에 한국의 전략적 선택으로 5가지를 제시한다. ①미국과 같이 중국을 견제하자는 한미동맹 강화론 ②중국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중국 편승론 ③독자적 핵 보유 또는 중립화 선언을 통한 홀로서기 ④미국과는 동맹,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를 유지하는 현상 유지론 ⑤초월적 외교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진영 외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초월적 외교. 우리가 선택할 슬기로운 외교는 무엇일까? 헨리 키신저가 2011년에 미국과 중국을 체스와 장기로 비유한 혜안은 절묘하다. 책은 각각 〈차이나는 클라스〉와 〈코로나19 이후, 대한민국 길을 묻다〉의 강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힌다. 성장도 양극화, 분배도 양극화, 외교도 양극화인 3K-양극화 시대

사당동 더하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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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2일. 철거 재개발이 지역 주민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를 하려고 '30대 중반의 사회학자와 인류학자 그리고 현장 조사 조교 남녀 대학원생, 이렇게 4명이 현장(13)'에 진입한 날이다. 현장은 사당4구역 2공구 재개발 지역으로 남성시장 입구 왼쪽으로 난 사유지 길로 들어가 약 300m에 이르는 산비탈이다. 철거가 진행되고 몇 가족을 추적 조사하다가 영구 임대 아파트로 이주한 '금선 할머니' 가족을 2011년까지 25년 동안 집중하여 관찰한 기록이다. 사당동은 서울시가 1960년대 서울 도심의 재개발을 위해 충무로, 중구 양동, 영등포구 대방동 철거민을 강제 이주시키며 형성됐다. 1968년까지 약 4000명을 트럭으로 옮겨 정착시켰다. 그 후 '무작정 상경했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무슨 이유든 싸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이주(114)'하며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지역 주민들의 주거 공간은 '가옥의 대지는 분양 당시 가구당 10평씩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옆집 대지를 사들여서 넓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10평인데 이 10평에 대부분 방이 세 개 이상 들어앉아 있고 2층으로 올린 경우에는 방이 더 많았다. 자가인 집주인들에게 방을 들어앉히는 것은 곧 수입을 뜻했다. 이 지역의 한 가구가 사용하는 방의 수는 평균 1.6개다. 자기 소유 가구는 2.2개, 전세 가구는 1.5개, 월세 가구는 1.2개로서 세입자들일수록 적은 수의 방을 쓰고 있다. 방 수 에서만이 아니라 사용하는 방의 평수도 자기 소유 가구는 4.6평, 전세는 2.9평, 월세 가구는 1.8평으로 차이가 난다. 가구별 가족 수는 자가 소유 가구나 세입자 간에 차이가 없는데도 세입자들이 사용하는 방의 수효나 평수가 작은 것은 이들이 주거 공간을 줄여 생활비를 줄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115)'. '어떤 가구는 한 집에 열여덟 가구가 세 들어 사는데 집주인이 다른 사유지에 살고 있어

착취도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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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과 서울 아파트의 평균 평당 월세 중 어느 곳이 더 비쌀까? 서울 전체 아파트의 평균 평당 월세는 3만 9400원인데 비해 쪽방의 평균 임대료는 18만 2550원이다. 쪽방 주민들은 4배가 넘는 임대료를 내면서도 난방, 취사, 세면은 물론 화장실도 갖추어지지 않은 주거공간에서 생활한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으로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 가뜩이나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마땅한 노력 없이 불로소득으로 폭리를 취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는 행태(58)'인 빈곤 비즈니스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쪽방촌에서 재현되고 있다. 2018년 기준 서울시 소재 전체 쪽방 현황 자료를 토대로 쪽방 실소유주를 추적했다. '쪽방 건물주 중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등 고급 주거 단지에 거주하는 인물이 적지 않았으며, 강남 건물주의 가족들, 중소기업 대표 등 재력가가 다수 포착됐다(99)'.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집에 사는 재력가가 종로에 소유한 허름한 건물'은 닭장에 가깝다. '제대로 된 직업도 없어 인력사무소에서 소일을 하며 매달 방세를 마련한 사람이 낸 그런 돈은, 흘러 흘러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도곡동 타월팰리스 옆에 있는 그 아파트로 흘러가(33)'고 있었다. 그렇다고 '안전을 문제 삼아 자치단체가 쪽방을 강제적으로 폐쇄하는 법적 조치를 검토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쪽방 주민들이 거리로 내몰리게 돼, 대부분의 자치단체는 적극적인 단속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104)'. '주거비 지불 능력이 없는 쪽방 주민과 노숙인들에게는 낮은 임대료만큼이나 '보증금이 없는 것'과 '유연한 계약 기간'이 중요한데, 쪽방은 매월 계약을 하고, 또는 일세(日貰)(59)'를 현금으로 내며 살기 때문이다.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아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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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수치나 공신력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27) 차별이란 애초에 설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29) 평등이란 하나밖에 없고, 불평등은 그 나머지를 전부 포괄합니다. 상대의 태도가 얼마나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하게 할 뿐입니다. 태도에 따라 틀린 말이 맞는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만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평등한가? (38) 페미니즘이 쟁취하고자 하는 권리는 기본권입니다. 밥 몇 끼 얻어먹으려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이는 없습니다. 기본권은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가져야 할 권리로, 무언가를 해야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가 제시하는 '틀'을 거부하고 기본권을 위해 싸웁니다.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의 틀 속에서 남성들에 의해 주어지는 알량한 배당금을 누리는 데 관심이 있기는커녕, 배당금을 포함한 틀 자체를 부수고 바꾸고자 합니다. (55) 남성은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싶은지, 유지하기 싫은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많은 수의 남성이 유지는 하고 싶은데 그냥 징징대고 싶었음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한들 설마 가부장제를 페미니스트가 만들었겠습니까? (56) 예쁜 말씨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위험한 게 바로 이런 예쁜 헛소리입니다. (79) 여성혐오와 남성혐오가 이렇게 쉽게 대등한 문제 취급을 받는 상황은, 성별 간 권력 차를 또 한 번 실감케 합니다. (...) 여성의 목숨을 해치는 죄와 남성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죄는 대등한 것인가 봅니다. 사회가 남성 가해자의 심증을 헤아려주고 여성 피해자의 허점을 들춰내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그의 기분과 나의 목숨이 같은 값인가 싶어 절망감이 듭니다. (115) 가부장제 + 남성의 억울함 = 이제는 남녀평등 그

늑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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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여 일 동안 네이멍구(內蒙古)의 초원과 사막 골짜기에서 풍찬노숙하며 늑대를 찾아 돌아다닌 야생일기입니다. 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던 2002년 5월 14일부터 국내로 돌아와 풍토병으로 고생한 7월 2일까지 늑대를 쫓아간 첫번째 여행의 기록입니다. 여행 내내 새끼 늑대에게 깡패와 어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데리고 다니며 키웠습니다. 늑대와 늑대굴을 찾아 헤매는 여행이었지만, 저자 스스로 알파 늑대가 되었습니다. '늑대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서도 보기가 어(189)'려웠습니다. 오랫동안 지속한 늑대 소탕으로 '늑대들은 사람들의 출현 자체를 죽음과 연결시키게 되었'고, '사람의 냄새는 곧 공포로, 죽음으로 연결되었을 것(278)'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때는 늑대 구경도 할 수 없는 낭만파인 우리와 늘 늑대와 함께 생활하는 현지인들의 생각(109)'은 달랐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현지인들은 늑대로 인한 가축 피해로 늑대와 늑대 새끼를 보면 죽입니다. 그런 생활환경에서 늑대를 찾아다니는 일행이 곱게 보일 리 없어 더 고생했습니다. 전 세계에는 약 200,000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습니다. '몽골과 중국과 미국에는 각각 15,000마리 정도'의 개체수가 있지만, 넓게 분포하고 있으므로 지역 단위로 보면 결코 많다고 할 수가 없(366)'습니다. 늑대 사냥을 장려하거나 밀렵을 방조하기 때문에 개체수는 감소하고 있습니다. 늑대를 찾아 떠난 유목 지대는 생존과 보존이 맞부딪히는 생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늑대가 끼치는 가축 피해는 예측 가능한 일상적인 위협입니다. '진짜 두려운 것은 살아 움직이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것은 형태도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덮쳐오는 자연재해(308)'로 죽는 가축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늑대를 더 미워하는 것은 '가뭄이나 홍수, 폭설과 혹한 같은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늑대는 잡아 죽일

그래서 우리는 달에 간다 - 곽재식의 방구석 달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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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작곡가이자 가수인 윤형주가 편곡한 유명한 음료수 CM송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달을 따다 나눠 준 일이 있었습니다. 1972년 12월에 마지막으로 달에 갔던 아폴로17호가 많은 돌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은 아폴로17호가 돌아온 지 반년 정도가 지난 1973년 7월에 이 선물을 받았는데,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인들에게 월석을 공개(248)'했습니다. 대전의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월석은 1969년 아폴로11호가 가져온 월석인데 대통령기록관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흥얼거리는 CM송이 나오기 전에 실제로 달을 따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달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여러 학설이 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거대충돌가설 (Giant Impact Hypothesis)이 지지받고 있습니다. '지구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45억 년 전쯤의 어느 날, 대략 지구의 10분의 1 무게쯤 되는 커다란 돌덩이가 지구와 충돌(21)'해서 부서져 나온 파편들이 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가설도 골치 아픈 문제가 있습니다. 지구를 들이받은 테이아(Theia)라는 돌덩이가 어디로 갔냐는 문제입니다.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달에 가서 달의 탄생과 달의 성질을 조사하면 그 지식으로 우리는 결국 지구의 모습을 더 명확히 알게 되어, 화산과 지진, 지각 변동과 지질 현상이 어떤 이유로 일어나는지(29)' 알 수 있습니다. 비바람도 물도 식물도 없는 달에 생긴 구덩이는 모양이 몇십만 년 동안 유지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 달의 충돌 구덩이들은 지난 긴 세월 동안, 지구 근처에 어떤 소행성들이 돌아다니다가 떨어졌는지를 꼼꼼히 기록해 둔 일기장(41)'과 같습니다. '달에 있는 수많은 구덩이들은 우리에게 지구를 위협할지도 모를 소행성과 혜성에 얽힌 사연을 더 많이 알려줄 것(48)&

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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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는 1986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입니다. 아홉 살 아들 표도르와 네 살 딸 베라의 엄마이기도 한 저자가 몸소 겪은 전쟁 초반의 참상을 기록했습니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5시 30분. 올가는 폭파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아이들이 깨어나자 팔에 이름, 생년월일과 전화번호를 적었습니다. 죽은 후에 식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날이 밝자 올가 가족은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미사일이 시내에 떨어지고 도시를 지구상에서 지우고 있었습니다. 우리집, 우리 마당, 우리 거리는 군대의 사격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피한 지하실에 분필을 가져오자 아이들은 폭격 소리를 들으며 '평화'라고 적었습니다. 지하 생활 초기의 새로운 만남은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지하실에는 임신부들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신분은 '지하실의 아이'가 되어 작은 케이크 한 조각도 최대한의 쾌락을 느끼며 먹어야 했습니다. 지하실에서 여덟 밤을 보낸 후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가 멈출 때마다 여자와 아이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한 엄마가 공책에 이름과 전화번호 리스트를 적어 자기 아이들의 옷 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 올가가 전쟁 첫날에 했던 것처럼 혹시 헤어지게 될까 봐 그랬습니다. 남편은 국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남자들은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다음에 만날 때 같이 까먹자며 'Love is' 껌을 주었습니다. 3월 6일 새벽 5시. 바르샤바 시내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도움을 받거나 구걸해야만 생계를 유지하는 난민이 되었습니다. 불가리아 임시 숙소를 제안 받고 3월 16일 불가리아 소피아에 도착했습니다. 올가와 두 남매 그리고 강아지 미키와 함께 도착하며 책은 끝납니다. 현재 올가는 불가리아 소도시에서 임시 난민 자격으로 현지 교회 도움으로 아파트에서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책 표지는 자화상이라며 "전쟁은 인격이 있는 사람을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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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은 1992년 도서출판 눈에서 펴낸 어느 40대 부부의 병상 일기이다. (11)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또는 가족을) 걱정하며 살아가지만, 실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고. (34) 송년회에 가서 오랜만에 보는 이들과 즐겁게 수다도 떨고, 새해 소원도 빈답니다. 아빠를 잊을 수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슬픔은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외면할 수도 없죠. 하지만 슬픔은 영원히 괴로워해야 할 낙인 같은 것은 아니에요. 당신 아이의 삶에는 기쁨도 정말 많을 거예요. 엄마가 없다고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업는 건 아니잖아요. (38)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 회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이 보상될 만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까? 아팠던 사람은 병을 살아낸 경험에 관해 말할 수 있지만, 돌보는 사람이 살아낸 것을 표현하기는 더 어렵다. 돌봄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우리 사회에는 별로 없고, 그래서 돌봄은 인정되지 못한 채로 남겨진다. (47) 궁극의 목표는 환자의 안녕이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는 늘 고민스럽다. 사람들은 의사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의사도 종종 혼란에 빠지곤 한다. (54) 말기암은, 아니 모든 질병의 말기는 자율성의 박탈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스스로 움직이고, 대소변을 처리하고, 먹고 자고, 깨어 있는 것이 어렵게 되고 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기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의 인격과 존엄을 지키기 어려워진다. 사실, 이것이 죽음에 임박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69) 인간이 태어나서 3개월, 즉 백일까지를 삶에 적응하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죽기 전 3개월은 죽음에 적응하는 시간이다. 암의 경우가 그렇고, 치매나 뇌졸중 같은 질환은 이 시간이 더 길어지기도 한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죽지도 않은 시간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나라는 인간이 아닌 시간이. (70) 아빠가

가난의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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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가난의 모습은 늘 변해왔다. (...) 이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중이 가장 높은 건 현재의 노인 세대로, 노인들의 가난은 그 구조가 복잡하게 꼬인 산물이다. 지금의 일부 노인들은 사회보험 제도가 정착하기 전에 노인이 되어버렸다. (9) 재활용품을 주워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이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한 대개의 국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층민의 일이다. (10) 가난이란 '간안(艱難)', 어려울 간과 어려울 난을 합친 두 자를 어원으로 둔다. 이로부터 파생된 건 '가난(家難)'으로 "집안의 재난"이거나 그 상태를 말한다. 빈곤(貧困, poverty)이란 "가난하여 곤한 상태", 다르게 말하자면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둘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회과학자들은 이 둘을 다르게 쓴다. 경험적으로 '가난'은 현상을 묘사할 때 사용하며, '빈곤'은 분석에 동원한다. (14) 이제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거주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강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는데, 1㎞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모두 다른 편인, 재활용품 줍는 노인 무리를 보았다. 물론 그들이 함께 다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경쟁 중이었고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엔 몰랐지만,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니까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28) 한국의 노인은 일을 많이 하는데도 빈곤하다는 뜻이며, 이는 현재 노인들 노후 생활의 경제적 기반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노인이 하는 노동의 대부분은 질 낮은 일자리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노인의 고용률이 상승한다 해도 빈곤율이 낮아지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45) '재활용품 수집 노인&#

미래의 교육,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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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인근의 소도시 니덤에 자리한 올린 공대 (Olin College of Engineering)는 2002년에 개교했습니다. '올린에는 5개의 전공 트랙만 존재하고 별도의 학과는 없(18)'습니다. 교수가 40명이고 학생은 350명으로 교수 1인당 학생수는 9명 정도입니다. 올린은 협력과 소통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21세기 엔지니어에게 협력과 소통의 능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25)'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람이 돼라. 있는 사람과 존재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그냥 있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반면 존재하는 사람은 주변에 영향을 주면서 상호 작용을 한다(28)."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협업과 소통을 강조하며 하는 조언입니다.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에 정보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일(42)'이 올린의 교육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올린에서 교수의 역할은 '가르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교육자에서 배움을 돕는 코치(58)'입니다. 교수의 역할을 조력자로 규정합니다. '교수는 학생들이 경험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통제와 규제로 학습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 속에서 학생들의 학습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수의 역할(59)'입니다. '학점이 아니라 배움에 중점을 두도록, 수동적인 학습이 아니라 주체적인 배움이 일어나도록 학생들을 변화'시키야 합니다. '협력과 소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학생들이 느낄 수 있(108)'도록 교육 혁신을 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교육이 세계적인 흐름이지만 '올린이 추구하는 경험 중심의 교육은 온라인으로 전달할 수 없(115)'고, 지식을 얻고 싶은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들으라는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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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7월, 교육부 장관이던 울로프 팔메가 고틀란드섬에서 휴가 중에 정책 간담회 요청을 받았습니다. 간담회장인 광장에 서 있는 덤프트럭 위에서 즉석연설했습니다. '트럭 연설이 열린 작은 마을 알메달렌이 스웨덴식 열린 광장 정치의 메카가 되는 순간(18)'이었습니다. 1982년 주요 정당들이 참여하는 알메달렌 주간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7월 초, 여야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 콘텐츠는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고, '휴가와 정치 그리고 언론의 결합은 이렇게 출발(19)'했습니다. 알메달렌 주간 은 이웃 국가로 수출이 되어 덴마크의 보리홀름, 노르웨이의 아렌달, 핀란드의 뵈네보리에서 정책 박람회를 개최합니다. '알메달렌은 처음 시작할 때는 그저 작은 지역의 정치 행사였지만, 모든 정당이 참여하고 정당 대표들이 직접 찾아와 연설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행사가 아니라 국민의 행사(29)'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늘면서 성장했습니다. 세미나는 4000여 개로 늘었고, 방문객은 4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정치인의 연설과 정책 토론도 내용과 재미가 적절하게 섞이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예술이 될 수(56)' 있다는 걸 알메달렌 주간은 보여줍니다. '정치는 약점을 파헤쳐 상대를 파멸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철학과 그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밝히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 통치하는 행위(57)'입니다. 낮에는 경쟁했던 정치인들이 밤에는 여야 전·현직 장관들이 댄스팀을 만들어 댄스 배틀을 합니다. '알메달렌에서 정치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것, 편안한 것, 신나는 것, 배려하는 것(57)'임을 보여줍니다. "눈이 나쁜데도 경제적인 이유로 안경을 쓰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48)" 총리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어린이 기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어린이 기자

나로 웅크리고 있는,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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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거실 넘기지 못한 달력이 있다. 손때 묻은 시간이 엉켜 있다. (30) 사방 방향을 제시해준다 견고하게 친절하다 그래도 우린 어디가 어딘지 모른다 (93) COVID-19 지루한 일상이 이어진다. 우리는 하얀 방패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138) 달 애써 풍경을 만들었다 우리는 즐거워야만 했다 (161) 오해 떠날 사람은 창밖을 보지 않는다 난 떠났고 넌 보냈나 (187) 나로 웅크리고 있는, 너에게/김지연/아마존의나비 20210315 198쪽 17,000원 시화집 덕분에 너무 익숙해서 무심했던 일상 풍경이 따스해집니다. 아직 살만합니다.

매혹하는 식물의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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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가장 먼저 창조한 생물은 식물이었다. (6) 일반적으로 식물은 인간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인간은 식물이 없다면 곧 죽고 말 것이다. (17) 35억년을 1년이라고 치면 20만 년은 겨우 30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광합성 생물이 1월 1일 0시에 탄생했다면, 현생인류는 12월 31일 밤 11시 30분에 막차를 타고 지구에 도착한 셈이다. (21) 식물이 꽃 이외의 장소에서 당밀을 분비하는 것은 강력한 보디가드를 고용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임을 명심하라. 식물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44) 진화란 '생물이 환경에 서서히 연속적으로 적응해가며 생존에 가장 적합한 형질을 발달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모든 종들은 서식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특정한 형질과 능력을 획득하거나 상실한다. 물론 진화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일어나지만 최초의 모습과 최종적인 모습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53) 고착생활을 하는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어 외부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그것은 모듈성이다. 식물의 몸은 여러 개의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필수불가결한 것도 없다. 이러한 모듈 구조는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61) 식물은 반복되는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의 가지, 줄기, 잎, 뿌리는 모두 매우 간단한 모듈의 집합체로, 다른 모듈과 독립적으로 몸체에 부착되어 있다. 마치 레고 블럭처럼 말이다. (63) 만약 식물이 내일 당장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인간은 몇 주, 길어야 몇 달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모든 고등생물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몇 년 후 식물들이 인간의 거주지를 접수할 것이며, 1세기 안에 모든 문명이 식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어떤가, 이 정도면 식물과 인간 중 누가 더 중요한지 판가름

그냥,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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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내가 정말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던 화살표 같은 존재들이 이제 내 곁에 없다는 것도, 나는 화살표 없이 살아본 적이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때 절절하게 깨달았다. (12) 야학을 그만두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가지고 나온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선'이라는 아주 강력한 것이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24) 2학년 6반 교실의 시계가 8시 45분에 멈춰 있었다. 누군가 8시 50분에 맞춰둔 것을, 뒤에 온 어떤 이가 조금 더 당겨놓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은 모두가 따뜻하게 살아 있었던 때. '가만히 있으라'는 죽음의 주술이 울려 퍼지기 전, 그리하여 무언가를 바꿀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시간. 8시 45분 단원고 교실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8시 50분 이후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저 무능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304명의 목숨을 수장시킨 후에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기록을 삭제하는 일이었다는 걸. (33) 나는 죄책감이란 것이 '먼저 달아난 사람'의 감정인 줄로만 여겼는데 그것이 '누군가를 구하려다 실패한 사람'의 것일수록 더욱 고통스럽고 지독할 수 있음을 알았다. 실은 죄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을 목격한 것에 대한 책임감일 것이다. (51) 사람들은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 나는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이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닌가. 장애인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을 버리고, 병든 노인을 버려서가 아닌가. 그들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이다. (79) 해마다 300명이 넘는 홈리스와 천 명이 넘는 무연고자들이 외롭게 죽어가는 이 거리에서, 집 없는 이들에게 주거비를 지원하는 데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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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녠(十年)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고아 출신으로 대낮보다는 달밤에 걷는 모습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살인마 집단 'JACK'의 조직원을 밥 먹고 물 마시는 일만큼 자연스럽게 죽이는 남자이기도 하다. 살인 집단 잭은 잭 더 리퍼의 전설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계승하는 살인마 조직으로 오른쪽 가슴에 알파벳 J를 새기고 있다. 납치한 피해자의 복부를 절개하고 다크웹에 영상을 올리는 집단이다. 중증 결벽증 환자인 스녠은 청소도구가 가지런히 정리된 가방을 메고 다닌다. 잭의 조직원을 죽인 후 더럽혀진 살인 공간을 깨끗하게 청소하기 위해서다. 스녠은 잭의 조직원이 마지막 한 방울의 피를 흘릴 때까지 기다리며 말한다. "주기적으로 청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큰 실례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군요." 특별히 착한 일을 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는 샤오쥔. 사축(社畜) 1 신세인 샤오쥔은 살인마에게 진부한 드라마 같은 납치를 당한다. 잭의 조직원을 해치우는 스녠과 처음 만나며 엮이게 된다. 스녠의 살인 방법은 야무지면서 잔혹하고 생생하다. 목표물이 즉사하지 않았다면 항상 유용한 청소지침을 알려준다. 그런 스녠의 오른쪽 가슴에도 알파벳 J가 새겨져 있다. 잭의 조직원을 죽이는 연쇄살인마가 되어 잃어버린 기억을 좇는 스녠의 살인은 정당할 수 있을까? 타이완 웹소설 플랫폼에 연재된 글이어서 진행 속도가 거침없이 빠르다. 다만 전개 과정이 상투적이고 놀랄만한 대반전이 없어 아쉽다. 묻지마식이나 혐오 살인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면 가해자 정보를 알아내 스녠에게 넘겨주고 싶다. 그럴 때 읽으면 대리만족을 할 수도 있다. 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지침서 獻給殺人魔的居家清潔指南, 2018 /쿤룬 崑崙 /진실희 역/한즈미디어 20210108 372쪽 15,000원 '회사에서 기르는 동물'이라는 뜻으로 박봉과 긴 노동시간, 고용불안 등의

뉴노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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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대 안전'이라는 근대적 대립 도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안전 속 인원'을 모색해야 한다. 한 사람의 반칙은 모두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 한 삶이 반칙하지 않도록 미리 배려해야 한다. (6) 인류는 코로나19와 함께 포스트-근대를 대비해야 한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이 그 전조라면, 코로나19는 근대의 끝을 알려주는 징조의 막내이자 마침표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그리고 코로나19라는 이 삼각편대는 근대를 산산조작 낸 진정한 다이너마이트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제시된 건 40년이 조금 넘었지만,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상황과 맥락에서 진정 포스트-근대, 탈근대가 논의되어야 한다. 이 작업은 근대와 적절하게 거리를 두면서 인류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7) '코로나 혁명'이 일어났다. 인공지능과 기후위기에 이은 대격변의 마침표다. (17) 코로나19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민낯을 드러낸 것 중 하나는 각국 정부의 성격, 또는 그 정부를 구성한 인민의 성격이었다. (21) 실험은 안전의 정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실험이 안전 자체를 목표로 삼지는 않으나, 실험 없이는 안전이 확장되지 못한다. 이런 피드백 고리 안에서 실험이 곧 자유라는 점이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한 사회가 실험을 감내하는 정도가 그 사회의 자유도(自由度)다. (31) 불평등과 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분열과 갈등은 커지고 영토는 흔들린다. 우리는 서로 보호해야 하며, 공동의 안전망을 함께 구축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의 자유도다. (35) 사방에 화약이 뿌려져 있지만 불씨를 운반하는 건 자유의 문제라고 오도하는 것과도 같다. 자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영토의 문제다. 영토가 망가지면 개인의 자유도 없다. (59) 공동체 수준에서 이 위험을 지켜내는 수단은 민주적 거버넌스가 유일하다. 민주주의를 오래 지키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라는 얘기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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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꾼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 유리한 발언을 할 뿐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개의치 않는다. (29) 한마디로 개소리는 주요 미디어 없이는 뜨기 어렵다. 매체는 개소리를 막으려고 애쓰면서도 이를 전파한다. 객관성을 중시하는 매체들은 진실에 얽매이지 않는 정치인과 캠페인을 다루거나 요즘 대중에게 친숙한 소통 방식을 택할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어떤 매체들은 그들이 선정한 정치적 의제나 그들이 처한 재정 상태 때문에 스스로도 미심쩍은 기사와 담론을 적극적으로 퍼뜨린다. (108) 트래픽이 높아진다는 것은 당연히 해당 사이트의 수익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제목은 나중에 바꾸더라도 일단 기사부터 올리면 트래픽이 올라가지만 시간을 들여 사실을 확인한 후 아무 기사도 올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112) 미디어에 대한 신뢰 하락이 곧 미국 사회가 얼마나 양극화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122) 기존 보도 관행은 트럼프의 개소리에 맞서고 그에게 책임을 묻기에 무기력할지 몰라도 회사의 순익에는 큰 도움이 된다. 이럴 때는 뭐든 순익에 가장 이로운 방법을 택하기 마련이므로 기존 틀이 그대로 유지된다. (131) 우리는 우리 수준에 맞는 미디어를 얻는다. 뉴스 미디어와 허위 사이트 둘 다 소비하는 대중이 있으니 그런 정보를 만든다. 정치인은 유권자가 반응한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우리가 서로 교류하게 해줄 뿐이다. 개소리가 기승을 부리고 믿을 만한 정보가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도 소비자이자 유료 독자이자 유권자로서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제 우리도 전통적인 매체와 거의 대등하게 정보를 만들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156) 우리에게는 개소리 확산에 일조하는 나쁜 습관이 또 있다. 소셜 미디어에 있는 기사를 읽어보지도 않고, 심지어 링크된 기사를 열어보지도 않고 공유하는 버릇이다. (165) 확증 편향 하나만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이보다 훨씬 강력한 심리적 편향이 있다고 한다. 내가 굳게 믿는 신념

보통의 것이 좋아 - 나만의 보폭으로 걷기, 작고 소중한 행복을 놓치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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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책에서 나는 이 동네에 소속감을 느꼈다. 그 새로운 공간들이 모두 내 것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를 느끼면서 나도 그들처럼 이 마을에 익숙해지고 싶었고, 그러기 시작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18) 나뭇잎의 그림자 사이로 빛나는 빛을 그릴 때마다 이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까 궁금했는데 검색해 보니 있었다. 우리나라 말로 '볕뉘'라고 한다. (43) 작게 태어나, 욕심 없이 사는 것 (69) 봄날의 산책은 남은 일 년을 살아갈 힘을 준다. (85) 아름다움은 멀리 있지 않다. 온 세상의 정보를 다 알게 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때로는 너무 먼 곳의 소식은 불필요하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것이 더 믿음직스러울 때가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걸으면 반드시 진정이 된다. 이상하게도, SNS나 미디어 같은 걸 보면 머리가 꽉 막히는데, 그냥 길가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92) 처음이라서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있었던 시절이 그립다.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었던 시간이어서, 세상 자체에 대한 첫사랑을 품은 시기여서 그만큼 그때의 모습들이 내 안에 오래 나아 있는 것은 아닌지. (115) 멀리서 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 깊게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 시간을 두고, 거리를 뒀기 때문에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이런 시선으로 내 삶을 보기도 한다. 나는 되도록 멀리서 나를 보려고 한다. 내가 남을 볼 때 그들의 고통이 보이지 않듯이, 지금 나의 고통을 내가 볼 수 없도록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 나에게는 삶의 한 요령이었다. (119) 산책이 내게 준 것은 며칠짜리 희망이었다. 이내 다시 힘들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벌어질지라도. '지금은 괜찮아.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같은 믿음이나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 힘듦이 쌓이면 다시 세상을 확인하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