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그냥, 사람

그냥, 사람
  •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내가 정말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던 화살표 같은 존재들이 이제 내 곁에 없다는 것도, 나는 화살표 없이 살아본 적이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때 절절하게 깨달았다. (12)
  • 야학을 그만두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가지고 나온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선'이라는 아주 강력한 것이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24)
  • 2학년 6반 교실의 시계가 8시 45분에 멈춰 있었다. 누군가 8시 50분에 맞춰둔 것을, 뒤에 온 어떤 이가 조금 더 당겨놓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은 모두가 따뜻하게 살아 있었던 때. '가만히 있으라'는 죽음의 주술이 울려 퍼지기 전, 그리하여 무언가를 바꿀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시간. 8시 45분 단원고 교실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8시 50분 이후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저 무능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304명의 목숨을 수장시킨 후에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기록을 삭제하는 일이었다는 걸. (33)
  • 나는 죄책감이란 것이 '먼저 달아난 사람'의 감정인 줄로만 여겼는데 그것이 '누군가를 구하려다 실패한 사람'의 것일수록 더욱 고통스럽고 지독할 수 있음을 알았다. 실은 죄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을 목격한 것에 대한 책임감일 것이다. (51)
  • 사람들은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 나는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이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닌가. 장애인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을 버리고, 병든 노인을 버려서가 아닌가. 그들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이다. (79)
  • 해마다 300명이 넘는 홈리스와 천 명이 넘는 무연고자들이 외롭게 죽어가는 이 거리에서, 집 없는 이들에게 주거비를 지원하는 데엔 고작 26억을 쓰면서 이들을 추방해 격리하는 수용시설에는 237억의 예산을 쓰는 이 현실에서, 촛불은 어디까지 왔나. (119)
  • 가난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없애는 손쉬운 길을 택한 국가가 '명랑한 사회 건설'을 위해 거리의 소년들을 쓰레기처럼 청소하는 동안,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이 당하는 폭력에 눈감았다. 먹고사는 일이 죽기 살기로 힘들었던 시절, 사람들은 그렇게 가난에 투항하고 말았다. (177)
  • 나는 장애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그랬던 내가 그 불쌍한 장애인들 속으로 떨어졌으니 인생이 비참해 죽을 것 같았는데, 그때 태수가 왔지. 그런데 그 장애인이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불쌍한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 태수는 나한테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줬지, 충격적으로. (216)
  • 사람들은 말했다. 차별이 사라져서 노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말에 힘껏 저항하고 싶었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할 때, 노들은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같은 구호는 수십 년간 집 안에 갇혀 살아온 사람이 외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버스란 그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풍경의 일부일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저항하는 인간들이 '발명'해낸 말이다. (...) 싸우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건 좋은 사회의 징조가 아니라 그 사회의 수명이 다했다는 징조인 것이다. (248)

그냥, 사람/홍은전/봄날의책 20200925 264쪽 13,000원

"우리도 버스를 타자!"는 말을 발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접두어 K를 붙여 K-○○을 자랑하는 시대인데, 그들도 그냥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