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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문법

가난의 문법
  • 한국사회에서 가난의 모습은 늘 변해왔다. (...) 이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중이 가장 높은 건 현재의 노인 세대로, 노인들의 가난은 그 구조가 복잡하게 꼬인 산물이다. 지금의 일부 노인들은 사회보험 제도가 정착하기 전에 노인이 되어버렸다. (9)
  • 재활용품을 주워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이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근대 자본주의가 등장한 대개의 국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층민의 일이다. (10)
  • 가난이란 '간안(艱難)', 어려울 간과 어려울 난을 합친 두 자를 어원으로 둔다. 이로부터 파생된 건 '가난(家難)'으로 "집안의 재난"이거나 그 상태를 말한다. 빈곤(貧困, poverty)이란 "가난하여 곤한 상태", 다르게 말하자면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둘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회과학자들은 이 둘을 다르게 쓴다. 경험적으로 '가난'은 현상을 묘사할 때 사용하며, '빈곤'은 분석에 동원한다. (14)
  • 이제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거주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강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는데, 1㎞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모두 다른 편인, 재활용품 줍는 노인 무리를 보았다. 물론 그들이 함께 다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경쟁 중이었고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엔 몰랐지만,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니까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28)
  • 한국의 노인은 일을 많이 하는데도 빈곤하다는 뜻이며, 이는 현재 노인들 노후 생활의 경제적 기반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노인이 하는 노동의 대부분은 질 낮은 일자리에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노인의 고용률이 상승한다 해도 빈곤율이 낮아지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45)
  • '재활용품 수집 노인'이란 가난의 표상으로 쓰이곤 한다. 노인의 동년배들은 연민을 표하고, 이보다 젊은 세대는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 실패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대처는 미미하다. 국가와 사회의 시도는 통계 내에서 어떤 숫자는 낮추고 어떤 숫자는 높이는 데에 맞춰져 있다. 정작 필요한 건, 노인의 생활을 개선할 실질적인 방편이다. (50)
  • 1㎏의 폐지를 판다고 가정했을 때, 고물상으로부터 받는 가격은 10년 전에 비해 더 줄었다. 2009년 8월에서 2014년 1월까지의 기간 동안 폐지 가격은 최대 203원(2011년 9월), 최소 68원(2012년 11월)이라는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평균 133원 정도로 현재에 비해 높게 형성되었다. 반면, 2020년 9월 현재 폐지 가격의 전국 평균은 66.6원이다. (107)
  • 재활용품 수집은 불로소득이거나 간헐적 취미 혹은 운동 거리가 아닌, 소득이 있는 비공식적인 노동이며, 이 일은 제도와 재활용 산업의 먹이사슬 끝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위험한 직업이라는 점이 확인될 뿐이다. (111)
  • 한국사회의 고용 정책은 65세 전후의 나이인 은퇴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하지 않게끔 계획됐다. (142)
  •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지만, 이들은 '청소부'가 아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주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행위는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청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산업에서 발생하는 돈 일부를 스스로 취하고 있을 뿐이다. (207)
  • 우리는 누군가의 가난을 보며 사회 체제의 불안정함과 미비함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깨달음은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스스로의 상대적 안정감을 확신하고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따름이다. (209)
  • 현재의 '지원' 형태는 노인들을 '치사'하게 만든다. 시혜적인 서비스 자체는 존속하겠지만, 누군가가 서비스를 받으면 누군가는 떨어져나가게 된다. 번번이 지원에서 밀려나는 일부 노인들은 홀로 두려움과 패배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224)
  • 한국사회는 노인이 되어서도 일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일하는 즐거움이나 자아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230)
  • 노인들을 선발해 돈 벌 기회를 주는 선별적인 정책으로만 땜질하는 복지로는 문제가 계속될 뿐이다. (255)
  • 우리가 정말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노인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다. (276)
  •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이 소득을 '재활용품 판매'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획득하게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노인들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기초소득을 가질 방법을 고민하는 데 있다. (278)

가난의 문법/소준철/푸른숲 20201130 304쪽 16,000원

1945년에 태어난 윤영자는 1965년 결혼했고, 3남 3녀를 낳았다. 두 아들은 대학교를 졸업했고, 두 딸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막내아들과 막내딸은 각각 전문대와 대학에 진학했다. 한창 일할 때는 학비를 댔지만, 나이 먹어 일하기 힘들 때 자녀에게 사업자금을 대주는 바람에 집을 팔고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집을 팔자마자 재개발이 되었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남편은 막내딸네 있고, 윤영자는 폐품을 주워 팔며 생활한다. 기초연금을 받으며 부정기적인 노인일자리사업에 지원한다. 재개발은 전셋집을 줄여 이사하게 만든다. 온종일 폐지 100㎏을 모아야 겨우 5000원 정도 벌이를 한다.

저자는 재활용품 수집을 하는 윤영자의 하루를 따라가며 가난의 문법이 된 일평생을 들여다본다. 윤영자가 가난에 이르게 된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재활용품을 주우며 사는 지금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2017년을 기준으로,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전체 인구 중 빈곤 위험에 처한 인구의 비율)은 17.4%로, 미국의 17.8% 다음으로 높다. 게다가 65세 이상 노인만을 살펴볼 때,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43.8%였다.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45)'.

폐지 줍는 윤영자를 포함한 모든 노인이 일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기초소득을 가질 방법은 정말 없을까? 분명 적절한 도움이 있을 텐데 우리는 방관하고, 사회는 방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