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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와 혁명의 순교자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와 혁명의 순교자
  •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의 큰 섬 사르디니아의 알레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에 속해 있긴 해도 사르디니아는 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 장화의 발꿈치만치 서쪽으로 떨어져있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의 섬이다. (5)
  • 그람시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발전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한다고 말하였으나 후진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이루어졌으니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의 『자본』의 주장에 거스르는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 혁명이 제대로 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가? 그람시는 이 두 의문을 모두 잠재우며 이를 오히려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를 드러내 보인 역사적인 현실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4)
  • 토리노의 『전진』 본부에 있다가 그람시의 사무실로 옮겨온 사람들은 1919년 5월 1일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 등과 '사회주의 문화비평' 주간지로 『신질서 L'Ordine Nuovo』를 창간했다. 이 저널은 두 가지 이유로 이탈리아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하나는 『신질서』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조만간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적인 핵심인사들이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신문이 이탈리아의 소비에트, 즉 공장평의회를 조직하기 위한 매체가 되어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이정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18)
  • 그람시에게 흔히 따라붙는 호칭 중 하나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자'이다. 물론 이 호칭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가 공산당 창당을 처음부터 주창하거나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람시는 사회당을 해체하고 공산당을 새롭게 창당하는 것에 내켜하지 않았으며, 위에서 아래로 건설하는 방식에도 회의적이었다. 게다가 보르디가가 주도하는 공산당 계획은 당과 대중의 관계나 공장 노동자조직 같은 신질서 그룹의 의제들과 전혀 부합하지 않고, 오로지 규율과 중앙집중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람시는 당면정세의 혁명적인 해결과 패배의 암흑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보르디가의 해법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26)
  • 1926년 11월, 파시스트 체제는 의원들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무솔리니에 대한 암살을 계획했다는 구실로 그람시를 포함한 공산당 의원들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사실 그람시는 당시에 자신이 구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44)
  • 1928년 6월에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공산당 지도자들을 재판했으며, 그는 파시스트들의 경계대상 1호였다. 그람시는 다른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20년 4개월 5일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우리는 이 자 두뇌의 작동을 20년간 중지시켜야 한다"는 수석판사의 논고는 유명하다. (45)
  • 사면에 의해 그의 형기는 1937년 4월 21일에 완료될 예정이었고, 그람시는 머잖아 자유의 몸이 된다는 희망으로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1937년 4월 27일,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그 날 그람시는 뇌출혈로 조용히 사망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영국인 공동묘지로 향하는 장례행렬에는 동생 카를로와 타티아나가 탄 차 한 대만이 조용히 뒤따랐고, 사람들은 '니노'의 부고를 라디오에서 알게 되었다. (48)
  • 그람시 이론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옥중수고 Quaderni del carcere』는 이탈리아어 제목 그대로 '감옥에서 쓴 수고'라는 뜻이다. 그람시가 수형생활을 하던 1926년부터 1935년까지 대학노트 32권에 2,848쪽에 이르는 필사본으로 남겨진 것으로, 그 주제는 이탈리아의 역사, 교육, 문화, 철학, 지식인의 역할, 국가이론, 여성의 지위,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방대하다. (49)
  • 그람시는 전통적인 지식인 또는 부르주아의 전문가들과 구별되는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존재를 제시했다. 유기적 지식인은 명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천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항상적인 설득자'이자 노동계급 내에서 조직성원이 되는 이들이다. 이들은 시대의 '이데올로기적인 광경'을 바꿔놓을 것이다. 물론 노동자가 지적 노동에 참여하고 체계적으로 학습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며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획득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그람시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54)
  • 그람시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진지전(war of position)'이라 표현되는 장구하고 어려운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어떤' 사회주의인가와 함께 '어떻게 건설되는' 사회주의인가라는 두 가지의 물음이 함께 제기되고 대답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파괴와 건설의 과정이자 의식적인 교육과 조직의 과정이다. 자본주의 전복 또는 해체에 관한 노동자혁명의 파괴적인 측면보다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그람시의 일관된 특징이었다. 평의회운동 시기의 '신질서'라는 신문제호부터가 이러한 측면을 반영한다. 즉, 그는 파괴나 해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를 강조한 것이다. 그람시는 이 모든 것을 마르크스주의 정치라고 사고했으며, 그것이 곧 '실천의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람시가 마르크스를 '실천철학의 창시자'라고 부른 것은 검열을 우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생각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중심적인 성격, 즉 이론과 실천, 사상과 행동 사이의 불가분한 연계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다. (55)
  • 헤게모니에 대한 레닌의 협소한 정치적인 정의와는 달리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이를 계급지배의 다차원적인 속성을 분석하는 데 도입했다. 즉, '부르주아 혁명기의 노동계급의 전망'이라는 원래의 의미로부터 '안정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 메커니즘'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62)
  • 그람시가 볼 때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구별되는 '층위'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어떤 이데올로기의 일관성은 전문적인 철학적 정교화에 의존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일관성이 그 이데올로기의 유기적이고 역사적인 효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철학적 조류들이 대중의 실천적이고 일상적인 의식이나 통속적인 사고에 들어가서 그것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킬 때만,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가 '상식'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 장소이다. (68)
  • 그람시는 올바른 판단만을 행하는 무오류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역사적인 승패라는 잣대로 보면 그는 실패한, 패배한 혁명가인지도 모른다. 그의 저작도 완결적인 저술보다는 난삽하고 단편적인 글들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환경의 제약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한 번도 놓지 않았던 현실 정치적인 관점과 특유의 '열린' 체계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68혁명에서, 유럽과 중남미의 좌파 정치에서, 해방신학과 교육학에서, 대항문화를 추구하는 미디어와 저널들에서, 그리고 여성주의 운동과 각종 소수자 운동에서 그람시와 그람시주의 정치는 어떨 때는 그의 이름을 달고 또 어떨 때는 아무런 표식도 없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녹아서 흐르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와 전쟁의 21세기 초엽의 복잡다단한 세계 속에서 숨쉬고 또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람시는 여전히 미래를 바라보는 망원경이다. (94)

안토니오 그람시/김현우/살림 20050510 96쪽 4,800원

그람시도 어렵고 더군다나 『옥중수고 Quaderni del carcere』를 펼치기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그람시 해제로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