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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자연사박물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그것은 절단기, 멍키스패너,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짓굽, 크고 작은 나사, T자관, U자관 그리고 줄톱 들이었다. 쇠로 된 것들뿐이었다. 모두 난장이를 닮아 보였다. (61)
  • 절단기, 멍키스패너, 플러그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짓굽, 크고 작은 나사, T자관, U자관, 줄톱 들이 난장이의 공구였다. 모두 쇠로 된 것들뿐이었다. (74)
  • 나는 아버지 옆으로 가 아버지의 공구들이 들어 있는 부대를 둘러메었다. 영호가 다가오더니 나의 어깨에서 그 부대를 내려 옮겨 메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넘겨주면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영희를 보았다. (95)
  • 말년의 그는 절단기, 멍키스패너, 플러그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짓굽, T자관, U자관, 나사, 줄톱 들을 부대에 넣어 메고 다녔다. 난장이네 동네에서는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났다. (207)
  •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268)

조세희/이성과힘 20250410(통쇄 331쇄) 416쪽 15,500원

자연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 그는 아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해나 사랑 따위는, 추운 겨울밤, 먹지도 못할 닭똥집을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철탑이나 고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의 선택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31)
  • 헬스장에 간 적도 없고 등산도 하지 않고 오직 공장에만 다녔던 것인데, 공장의 노동은 근육을 만드는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에게 주먹을 휘두른다면 근육을 빼앗긴 그의 몸은 저항할 틈도 없이 휘청, 나자빠질 것이다. (40)
  • 국가도 법도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만 한 사람들은 안다. 회사는 언제나 그들의 삶의 반대편에 서 있다. 결국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다가 누군가는 비틀거리고, 전향하고, 남은 몇몇은 거리나 굴뚝 위로 몸을 던질 것이다. 그런 그들을 연민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그 이상 무언가 더 하지는 못한다. (45)
  • 소송에서 이기지 못하거나 천막을 접는다면 또 다른 '아불들'이 생긴다 해도, 분쇄기에 손목이 날아간다 해도 슬퍼할 수조차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두 손 중 한쪽은 스스로 자르게 되는 거야. 끝까지 가봐야지." (127)
  • 재이는 저녁 내내 낡은 소파에 엎드려 소녀 그림을 그렸다. 모두 손이 없거나 발이 없거나 한쪽 눈을 감고 있었고, 그것도 아니면 아예 옆모습이거나 뒷모습이었다. 낮의 일도 그렇고 기형적인 그림들도 그렇고, 딸의 마음속에서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그냥 둘 일은 아닌 듯했다. (153)
  • 나는 루손 섬 강변에 지었다는 통나무 감옥을 떠올린다. 폭우가 내리고 강이 넘치면 안에서 익사하고 마는 그때서야 감옥 문을 열어 강으로 떠내려 보냈다는. (197)

이수경/강 20200528 216쪽 13,000원

조세희 작가는 "나는 지금도 박정희, 김종필 등 이 땅 쿠데타의 문을 활짝 연 내란 제일세대 군인들이 무력으로 집권해 피 말리는 억압 독재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10)"이라고 했다.

이수경 작가는 "작가 조세희 선생은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 폭압의 시대'였던 칠십년대, '내란 제일세대 군인들이 억압 독재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글의 전문을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기억한다. 그리고 부조리한 시대와의 반목과 대결로 태어난 '난장이 연작'과 같은 소설이 있었기에, 나도 소설가가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212)"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조세희 작가는 "내가 '난장이'를 쓸 당시엔 30년 뒤에도 읽힐 거라곤 상상 못했지.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읽힐지, 나로선 알 수 없어. 다만 확실한 건 세상이 지금 상태로 가면 깜깜하다는 거, 그래서 미래 아이들이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며 눈물지을지도 모른다는 거, 내 걱정은 그거"라고 말했다. 《난쏘공》 발간 30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30여 년 전의 불행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서글픈 역설이었다. 거인들은 직접 사람을 죽일 수 없게 되자 감옥을 만들었다. 난장이 자식들은 폭우가 내리면 익사하는 강변에 지은 통나무 감옥으로 여전히 꾸역꾸역 출근한다.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에 태어난 《난쏘공》과 "21세기 노동가족 생존기"인 《자연사박물관》은 화자를 바꿔가며 하나의 실타래로 엮여 있다. 무려 4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다. 난장이 김불이가 들고 다녔던 절단기, 멍키스패너, 플러그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짓굽, T자관, U자관, 나사, 줄톱을 여전히 들고 다닌다. 오히려 비정규직이라고 불리는 난장이들이 더 많아졌다. 거인은 더 거대해졌고, 지상에서의 선택마저 없어진 꼽추와 앉은뱅이는 철탑과 고공으로 올라간다. 자식의 자식, 그 자식의 자식들까지 절단기와 줄톱이 대물림될 《일만 년 후의 세계》라면 사랑도 희망도 죽는다.

《난쏘공》과 《자연사박물관》은 유명하지만 나와는 무관한 고전이 진작 됐어야 한다. 낙원구 행복동에 살던 난장이 가족과 철탑과 고공에 오르는 노동자, 하루아침에 해고되는 비정규직은 자연사 박물관에 박제해 놓고 오로지 그곳에서만 봐야한다.

혁명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만국의 난장이여, 혁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