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청년공은 오랜 기간 떠돌이로 살았습니다. 마산 바닥에서 월세살이하던 실업계 고3 시절, 공부도 싫고 등록금 낼 여유도 없어 취업하려고 했습니다. '대다수가 누린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할 요소들이 기간제 상품(17)'일 만큼 가난해서였습니다. 교복을 벗는 순간만 고대했지만, 고민 끝에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고졸이란 딱지는 수갑이며 죄수복이자 족쇄나 다름없(18)'었기 때문입니다. 폴리텍대학에 진학해서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돈만 주면 지옥 맨 아래층의 재래식 화장실 청소(39)'라도 할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졸업 후 산업 기능 요원으로 일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4월 16일 소집 해제했습니다. 페인트칠 막노동을 하다 한국지엠 하청업체, SNT중공업 하청업체, ISO 탱크 컨테이너 정비업체, 현대로템 하청업체, 또 다른 SNT중공업과 현대로템 하청업체, 볼보 하청업체에 이르기까지 지난 12년 동안 수많은 공장을 전전했습니다. 그중 절반을 용접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수중에 들어오는 급여는 2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청년공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는 힘들고 꾸역꾸역 생존은 가능한 나날(9)'이었습니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을 해달라 절규하는 하청 직원들이 있는데 동일 노동조차 안 시켜주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청업체 용접공 자리는 경력을 깡그리 무시하고 임금은 최저 시급으로 후려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재벌의 횡포가 아메리카노 정도라면 눈앞에서 직접 체험하는 차별은 에스프레소 원액(111)'만큼 썼습니다. 원청이 곡소리가 나면 하청업체는 이미 사십구재를 지낸 뒤였습니다. 이십대 남성은 공정론, 한탕주의, 일베와 펨코, 안티 페미니즘이란 문자의 감옥 안에 갇혔다. 젊은 친구들 말 좀 들어보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결국 수도권 대학생들만 예시로 들 뿐. 지금껏 내 삶에서 함께해왔던 동료의 목소리는 바깥으로 가닿지 않았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던 이들이 되레 능력주의의 시선으로 청년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