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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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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년 대한민국, 80세 이상 노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자는 시위가 도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명이 보통 100세이다 보니 정년퇴직은 70세에 하고 90세가 넘어서도 일을 합니다. 94세의 할머니가 122세의 부친을 간호하는 세상입니다. 그 부녀가 받는 국가노령연금을 비롯한 보조비와 의료비 할인을 합하면 젊은이 셋의 월급을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청년 세 명이 수입의 반을 내놔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는 꼴입니다. 때마침 노인 투표권 박탈을 공약으로 내건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노인차별주의자들은 자기 세대가 겪는 모든 궁핍을 전부 늙은이들 탓으로 돌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들의 무임승차를 벌충하기 위해 젊은이들 지하철 요금은 밥 한 끼 값이 넘었고, 값싼 고령 인력 때문에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은 정작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하철은 온통 노인들뿐입니다. 젊은이들은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노인들이 왜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냐며 분노합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이고, 노인들은 아이들한테서 잠시 빌려 살고 있다면서 말입니다. 장길도는 70세가 되어 국민연금공단에서 이제 막 퇴직했습니다. 장길도는 퇴직하기 전까지 국민연금공단 연금이사 산하 기금합리화 지원실 소속 노령연금TF팀의 외곽 공무원이었습니다. 납입액을 상회하는 노령연금 수급자들은 적색 리스트에 오릅니다. 외곽 공무원은 연금 과다수급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조기 사망할 수 있게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 즉 본인의 부주의나 불운해서 죽은 것처럼 꾸미는 일입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강제로 처리합니다. 노화라는 국가적 동맥경화를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외곽 공무원이 암약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장길도는 죽은 노인은 착한 노인이고, 자살한 노인은 우리 사회의 동지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요양병원에서 요양을 하는 아홉살 연상인 아내 한수련은 9년 전부터 노령연금 수급자입니다. 장길도가 퇴직하자마자 한수련은 노령연금...

도서관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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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다.(A library is a growing organism.)' 이 문장은 도서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도의 수학자이자 문헌정보학자인 S. R. 랑가나단이 제시한 '도서관학 5 법칙' 중 마지막 법칙이다. (4) 도서관은 이미 아날로그 및 디지털 정보와 지식을 입력(input)하는 수준을 넘어 입력된 내용을 기반으로 상상하고 창작하는 출력(output)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지식정보를 제공하는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는 태도를 살펴봐도 시설과 장서를 관리한다는 관점이 이용자와 사서의 소통에 주안점을 둔 사람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14) 지나친 이기심 때문에 친구도 이웃도 없다는 오늘날, 공공도서관이 지역사회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이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주민들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의 가치를 확인하고, 활성화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35) 게다가 '메이커 스페이스 maker space ' 로 대변되는 창의 공간 기능까지 요구받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독서를 하면 좋다'면서 입력(input)만 강조하던 도서관이 '독서를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란 질문을 던지면서 출력(output)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46)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상상력, 창의력, 융합, 감성, 윤리 등 아날로그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향해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디지털 대전환이 진행되면 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아날로그 영역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우리 삶의 본질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논의와 고민에서 도출되기 때문이다. (72) 이제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코로나 일상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기존 생각의 틀을 완전히 바꿈으로써 변화된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디지털 대전환을 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세대는 디지털 대전환을 단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 가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특별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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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영화를 만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아무리 귀찮아도 만날 수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가족이다' 그런 실감이 나를 새로운 해방구로 이끈다. (7) 내 기억 속 이카이노는 여성들이다. 이카이노에 사는 할머니, 어머니, 며느리, 딸들은 제주도와 경상도, 오사카 사투리로 말했다. 뼈 빠지게 일하고 호탕하게 웃던 그녀들 뒤에는 가혹한 역사가 감춰져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둘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계속 파헤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24)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31) 지금에 와서야 짐을 싸던 어머니의 미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눈에는 일본에서 온 상자와 봉투를 열어보고 기뻐할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오직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볼 수 없는 가족의 웃는 얼굴을 매일매일 떠올리면서, 그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도록 다음번 소포에 무얼 담을지 궁리했을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씁쓸함을 상상으로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45년 동안 "부모밖에 못 하지"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을까. (43) 잠옷 차림으로 진심을 말하는 아버지도,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버지도 모두 나의 아버지였다. (88) 새엄마 혜경 씨가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

시인의 오지 기행 - 고요로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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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시인은 "도시 사람들은 왕따가 되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다.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수록 왕따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27)"이 오지에 살고 있다며 "스스로 왕따이기를 자초한 사람들"을 찾아간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31)"라는 백석의 시를 인용하며 오지 사람이 따라준 오디술을 받는다. 염소를 잡는 날이면 염소들이 우리를 나가며 울부짖는다거나 며칠씩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이문재 시인은 전기가 들어오면 그곳은 더 이상 오지가 아니란다. "전기가 들어가고, 도로가 뚫리면 끝장난다(42)"며 히말라야를 여러 번 다녀온 친구에게 들에 들은 얘기를 전한다. 오지는 전기와 신문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단절될수록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유영금 시인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박후기 시인은 오지를 이렇게 말한다. "물리적인 거리, 혹은 도달 시간만을 두고 말한다면 더 이상 '오지'는 없다. 달 표면에도 이미 인간의 발자국이 찍혔으며, 패스파인더(미국의 무인 화성 탐사선)는 화성의 어느 골짜기에서 추위를 견디며 길을 찾고 있다. 마음에서 잊힌 곳을 찾아간다고 했을 때, 오지라는 말은 비로소 원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지는 깊은 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닿고자 하는 바람으로서의 심원으로도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내 발길이 닿지 않은 서울 하늘 아래 어느 좁은 골목도 오지요, 강과 계곡의 깊숙한 곳 또한 오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10)" 하지만 오지란 살 곳이 못 된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집을 짓지 않고 떠나는 첫사랑처럼, 사람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는 지금 그곳에 있지 않다. 늘 무언가를 찾아서, 누군가를 잊으려 길을 떠나지만, 차마 인연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고 잠시 벗어 둔 옷가지를 챙기듯 주섬주섬 다시 싸들고...

홀로코스트 산업 -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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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홀로코스트 산업의 해부이자 고발장이다. 앞으로 나는 '홀로코스트'가 나치 홀로코스트의 이데올로기적 재현임을 주장할 것이다. 1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처럼, 미약하다 할지라도 홀로코스트 산업은 현실과 관련을 맺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임의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홀로코스트의 중심 교리에는 중요한 정치적·계급적 이해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실제로 홀로코스트는 이데올로기적 무기임이 입증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이용하여 끔찍한 인권 기록을 갖고 있는 세계적인 군사 강대국이 '희생자' 국가로 자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민족 집단이 희생자의 자격을 얻고 있다. 또한 그럴듯한 희생의 허울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35) 1948년 건국으로부터 1967년 6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략적 계획의 중심부에 위치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건국을 준비할 때 트루먼 대통령은 국내 사정(유대인 득표)과 국무부 경고(유대인 국가 지지가 아랍 세계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다는 경고)를 비교하면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한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을 저울질하다 아랍의 손을 들어주었다. (52) 독립 당시에 비해 1967년의 이스라엘은 훨씬 더 강력했다. 이스라엘과 미국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무난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몇 년 안에 이스라엘이 이웃 아랍 국가들을 완패시킬 수 있다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빅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전에 이스라엘을 위한 유대계 미국인 동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놀랍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산업은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가 나타난 후에 비로소 출현했으며, 극단적인 이스라엘 승리주의가 판을 치는 와중에 성공의 궤도에 올랐다. 상식적인 해석의 틀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 명함만 없던 여자들의 진짜 '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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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쉰 적이 없는데 명함이 없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노동을 '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생 일만 했는데 "딸이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차단당했고, 살림 밑천이라 불리며 일찍 생계활동에 뛰어(4)"든 여성들입니다. 1950년대에 태어난 딸들은 "아들 없는 집에서는 눈칫밥을, 아들 있는 집에서는 식은밥을 먹으며(44)" 자랐습니다. 학교를 못 간 딸들은 민증 없는 노동자가 됐지만, 대접은 달랐습니다. 급여 차이는 물론 "직장 여성의 특성을 조사한 결과 가사에 소홀하고 사치하는 편(48)"이라는 차별적 시선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10대에 여공으로 일을 시작했고, 20대에 엄마가 돼 가사노동을 했습니다. 출산과 육아기에는 일터를 떠났다가 30대에 다시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40대에 외환위기를 겪으며 비정규직이 됐고, 50대 이후부터 청소·요양·간병 등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했습니다. 육십을 넘긴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 "2020년 65세 이상 여성 취업자는 124만 6400명으로 25~29세 여성 취업자(115만 명)보다(54)" 많습니다. 집사람이라고 불렸던 K-딸들이 하는 가사 노동은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이후 무려 68년(62)"이 지난 2021년 5월에 법적 노동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필수노동'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2021년 5월 18일 법률이 제정됐지만, 업종을 명시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직업분류표를 참조해 ➀가사 및 육아도우미 ②간호사 ③돌봄 및 보건 서비스 종사자 ④배달원 ⑤보건의료 관련 종사자 ⑥사회복지 관련 종사자 ⑦자동차 운전원 ⑧청소원 및 환경미화원 등 8개 직업을 필수노동에 해당한다(99)"고 봤을 때 "필수노동자 4명 중 1명은 60세 이상 여성 노동자(98)"입니다. 50세 이상 여성을 포함하면 42.1%에 이...

페미니즘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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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ler Feder 페미니즘은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분노, 역사적·현실적 맥락 살피기, 복수 명사로서의 이론과 실천 따위로 정리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불온하고 불편하다. 게다가 정답도 없다. 페미니즘은 완벽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정해진 틀도 없는 이론이자 실천이다. 일상생활에서 제기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대표하는 이론가도, 이를 재생산하는 후계자도 없다. 그래서 이론을 진리로 주장하기 위해 권력의 장악과 권위가 필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받기도 쉽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은 장점이기도 하다. 역사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이 나오고, 그것이 또 다른 페미니즘을 낳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 정의한 벨 훅스는 "페미니즘 정치의 취지와 방향에 대해서는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페미니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전략만큼은 다양해야 한다.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천차만별이므로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은 언제나 변화하며, 그에 따른 차별의 양상도 달라진다. 또한 여성은 모든 계급과 지역에 존재하고, 모든 연령을 경험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트너를 선택하고 가족을 구성한다. 여성은 어디에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언제나 변한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그 어떤 사상보다 활발하게 내부를 비판하고 논쟁해왔다. 페미니즘은 질문과 논쟁의 역사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지속적인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반복된 노력이다. 따라서 어떤 여성들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개인의 욕망이나 가부장제를 허무는 활동을 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의 역사이다.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슈화하는 것, 이것이 페미니즘이다. 그런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언제나 앞장서서 역사를 변화시...

그들이 온 이후 - 토착민이 쓴 인디언 절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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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이듬해 함선 17척을 이끌고 신대륙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카리브제도와 아메리카 본토의 부왕 겸 총독"으로 임명받아 에스파뇰라섬(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에 작업장을 차리고 곧바로 토착 타이노족 주민들을 노예화하고 멸종시키는 정책에 착수했습니다. 초기에 800만 명이었던 타이노족은 1496년에는 300만 명, 1500년경에는 10만 명가량 남았습니다. 1542년에는 겨우 200명만 살아남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이들은 1500만 명에 달했던 카리브해의 다른 토착민들과 함께 멸종되었습니다. 콜럼버스 친구의 아들로 알려진 라스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에는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기록이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한칼에 사람을 두 쪽 내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내장을 꺼낼 수 있느냐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젖먹이 아기의 발을 잡아 엄마 품에서 떼어내어 머리를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들을 함께 칼로 찔러 꼬챙이처럼 꿰기도 했다. (28) " 유로아메리카인들의 500년에 걸친 대량 학살과 약탈로 인디언들의 고통은 지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1513년 유럽 탐험대가 플로리다로 상륙하면서 천연두가 대륙에 퍼졌습니다. 1520년부터 1890년까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 41차례나 천연두와 풍토병이 돌았는데 고의로 퍼뜨렸다는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더 잔인한 군사작전을 전개하며 영토 확장을 전개했습니다. 1830년대에 미국 동부지방을 청소하여 백인 정착민들의 식민지역으로 만들기 시작하며 체로키족은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1840년대에는 태평양까지 진출하기 시작하며 인디언 절멸논리를 펴나갔습니다. 1890년에는 미국 내에 살아남은 인디언 수가 25만 명에도 못 미치고 사망률이 95%를 웃돌...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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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늘 경제학의 문제였다.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는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싶어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여성들은 상속받을 권리, 소유의 권리, 창업의 권리, 돈을 빌릴 권리, 동일한 일에 동등한 임금을 받을 권리, 그리고 돈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해 결혼할 수 있도록 스스로 돈을 벌 권리를 얻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았다. 페미니즘은 지금도 돈의 문제다. (10)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당시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이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하고, 눈물을 훔치고, 이웃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어떤 식으로 시장을 바라봐도 그것은 또 하나의 경제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경제 말이다. (31) '제2의 성'이 있듯 '제2의 경제'가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맡아 온 일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시각이 경제학적 세계관을 정의한다. 여성의 일은 '그 외의 일'이다. 남성이 하지 않는 일,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남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일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절반의 답을 찾은 데 불과하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이다. (32) 만일 경제학이 자기 이익의 추구를 연구하는 과학이라면 여성은 여기에 어떻게 적용될까? "남성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역할, 여성은 손상되기 쉬운 사랑을 지키는 역할이 주어졌다"가 정답이다. 그리고 이 역할 때문에 여성은 소외되었다. (52)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에 들어간 노동을 가치 없다고 ...

프랑스의 대숙청 - 드골의 나치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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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탱 비시정부와 드골 자유프랑스 나치 독일군이 1940년 5월 10일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5월 15일 네덜란드, 5월 28일 벨기에가 히틀러에게 항복했다. 독일군은 마지노선 을 피해 벨기에와 접한 서부 전선을 돌파해 프랑스를 동서로 가로질러 진격했다. 영·불·캐나다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포위당하며 위기를 맞았다. 5월 29일부터 6월 4일까지 덩케르크 대철수작전으로 연합군 34만여 명은 영국으로 철수했다. 6만 8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뒤였다. 6월 16일 밤 레이노 정부가 총사직하며 부총리였던 필립 페탱 장군은 나치독일에 휴전을 제의했다. 페탱은 6월 17일 낮 12시 30분 라디오 연설을 통해 프랑스군은 전투를 중지하라고 했다. 영국에 있던 드골은 6월 18일 끝까지 저항하자는 연설 을 BBC를 통해 내보냈지만 이미 늦었다. 6월 22일 독일과 프랑스는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1918년 휴전 협정에 서명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철도마차 를 타고 독일이 항복했던 콩피에뉴 숲에서 이루어졌다. 르와르강 북부의 프랑스(국토의 55%)는 나치독일이 직접 점령하고 남부 프랑스는 온천으로 유명한 중부 휴양도시 비시 에 페탱을 중심으로 한 휴전파가 정부를 만들어 통치하게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창설했다. 프랑스는 반나치 저항운동을 지휘하며 연합군과 함께 세계대전에 참전한 자유프랑스와 나치와 협력하는 비시정부 로 나뉘게 되었다. 2. 북아프리카 군부숙청과 파리 해방 영국에 망명한 드골은 프랑스 본토에 반나치 저항단체를 만들어 프랑스 해방의 날에 대비했다. 드골은 자유프랑스와 본토 반나치 저항운동의 최고지도자였지만 국제적 지위는 취약했다. 미국은 비시정부와 전략적으로 외교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1942년 11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자 나치의 공세가 수세로 변했고 독일은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다. 드골은 자유프랑스를 북아프리카로 옮기기로 했다. 비시정부의 정통성을 빼앗고 본토의 저항운동을 지휘하기 위해서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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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대도시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킹스 애벗은 남 얘기하는 일이 취미이자 오락인 마을입니다. 킹스 애벗에는 킹스 패독과 펀리 파크라는 두 저택이 있습니다. 킹스 패독은 패러스 부인이 죽은 남편에게서 물려받았고, 펀리 파크는 전형적인 시골 대지주로 보이는 로저 애크로이드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로저 애크로이드는 예의바르고 지역에 많은 돈을 기부했습니다만, 개인적인 지출에는 구두쇠였습니다. 어느 날 자기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던 패러스 부인이 자살했습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인 킹스 애벗은 패러스 부인이 로저 애크로이드와 결혼할 것으로 믿었는데 갑자기 비극의 한가운데 놓이게 됐습니다. 패러스 부인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이 돌기 시작할 때 제임스 셰퍼드 박사는 펀리 파크로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갔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애크로이드는 따로 셰퍼드와 함께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단둘이 있게 되자 애크로이드는 셰퍼드에게 무서운 비밀을 털어놨습니다. 패러스 부인은 애크로이드에게 남편을 독살했다고 고백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자에게서 협박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패러스 부인은 24시간만 말미를 달라며 연락이 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 집사가 우편물을 놓고 갔습니다. 애크로이드는 셰퍼드 앞에서 패러스 부인이 죽기 직전에 보낸 편지를 읽다가 멈추며 혼자 읽겠다고 했습니다. 셰퍼드는 협박범의 이름이라도 읽으라고 종용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셰퍼드는 설득이 수포로 돌아가자 펀리 파크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셰퍼드가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를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로저 애크로이드가 살해된 채로 발견됐다는 전화였습니다. 의사인 셰퍼드는 붕대와 솜 같은 외과 처치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방에 집어넣고 차에 올라 펀리 파크를 향해 속력을 내어 달렸습니다. 살인 사건은 셰퍼드 박사의 옆집에서 호박을 기르고 있던 은퇴한 에르퀼 푸아로 탐정이 개입하게 됩니다. 셰퍼드는 푸아로를 도우며 수사 진행을 꼼꼼히 기록합니다. 연이어 벌어진 사건으로 펀리 파크에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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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는 휴남동 서점 주인입니다. 어린 시절 로망이었던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있는 서점이라는 공간은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공간입니다. 매일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준은 한쪽엔 고급 단추들이 달려 있지만 반대편엔 구멍이 없어 첫 단추만 꿰여 있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단추들은 오로지 취업만을 위해 만들어진 단추들(79)"이었습니다. 첫 단추만 겨우 끼운 민준은 휴남동 서점에서 시간당 1만 2천원인 바리스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합니다. 음악에서 화음이 아름답게 들리려면 그 앞에 불협화음이 있어야 하듯이 우리 인생에도 화음 앞에 불협화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화음 같은 일상인지 불협화음 같은 일상인지는 어떻게 알까요. 나는 화음 같은데 사람들은 불협화음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요.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꿈과 즐거운 일 중에 어느 것을 좇아야 할까요. 어떤 생각이 들었으면 틀렸는지 맞았는지 결정하지 말고 우선 안고 살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휴남동 서점에서 2년이 지나자 민준은 첫 단추만 꿰어 있는 옷으로 낭패를 봤지만 지금은 구멍이 뚫려 있는 옷으로 바꿔 입을 만큼 커피 만드는 일에 빠졌습니다. 영주는 일을 "제일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밟고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생각했던 과거를 후회합니다. 일은 밥과 같다며 "이제 소박한 밥을 정성스럽게 먹는 사람(343)"으로 변했습니다. "혼자 하이힐 소리 딱딱 내며 앞으로 미친듯이 걸어가다가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는데, 주변 사람들도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쉭쉭 지나쳐 가고 있(45)"는 세상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절로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하게끔 설계된 이 세상에서 달리기를 멈추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는(56)" 곳이 휴남동 서점입니다. 휴남동 서점에는 성공이 아니라 치유와 돌봄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몇 권의 책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쓴 몇 ...

표구의 사회사 - 기록되지 않았던 미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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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란 종이나 비단에 그린 작품의 감상과 보존, 보관, 이동을 위해 가장자리와 뒷면을 튼튼하게 보강하는 일이다. 이런 표구의 기본 목적은 작품의 뒷면에 종이를 두 겹, 세 겹으로 발라 튼튼하게 만들어 보존하기 쉽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작품에 어울리는 여러 색깔과 무늬의 비단을 배치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 일도 보존 못지않게 중요하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훼손되었거나 낡은 작품을 수리 • 복원하는 기술까지도 포함된다. 이처럼 표구로 마무리하는 과정이 필요한 작품으로 종이나 비단에 먹이나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꼽을 수 있고 서예나 자수, 탁본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표구 과정을 거치면서 족자, 병풍, 액자의 형태를 갖추게 되고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세워져 감상의 대상이 될 준비를 마친다. (17) '표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종이나 비단에 쓰인 글씨와 그림, 곧 서화(書)의 뒷면에 다른 종이를 덧발라 보관과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기술은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 중국에서는 이 기술을 가리켜 '장황(裝潢)', '장배(裝背)'라고 했다. '장(裝)'은 '단장한다' 즉 꾸민다는 뜻이며 '황(潢)'도 '책을 꾸민다'는 뜻을 지니는데 동시에 황벽(黃蘗)나무 즙으로 염색한다는 의미도 있다. 곧 책 표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일을 가리키며, 고대 불교 경전을 황벽나무에서 뽑아낸 노란 즙으로 물들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황벽나무의 즙은 벌레나 세균이 싫어해서 이렇게 물을 들이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 일본인 표구사가 차린 전문 상업 표구점은 확실히 조선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비단 상업 표구점뿐이 아니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미술'과 관련된 모든 것이 조선에게는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아니, '미술...

고양이가 쓴 원고를 책으로 만든 책 - 새끼 고양이, 길 잃은 고양이, 집 없는 고양이를 위한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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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쓴 책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가 타이핑한 원고를 번역한 책입니다. 원고 는 숫자와 문자의 조합으로 이뤄진 암호문처럼 보였습니다. 넓적한 앞발로 자판을 친 오타임을 알아채자 원고는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지능을 지닌 고양이가 쓴 것이 분명했습니다. 오타에 익숙해지자 제대로 타자한 원고처럼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과 고양이의 관계에 대한 비법과 처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18)'이었습니다. 고양이가 인간을 접수하는 걸로 시작합니다. '고양이가 인간 세계로 들어가는 일'을 접수한다고 해. 고양이가 인간의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룻밤 사이에 '인간의 습관과 버릇도 바뀌고, 집도 더 이상 인간의 것(18)'이 아니라 고양이 차지가 돼. 이걸 접수하기라고 부르지. '인간 남자는 대체로 불안정한 종이야. 게다가 특히 집안 문제에는 우유부단하지. 이런 면을 이용하면 인간 남자를 다루기란 식은 죽 먹기야(35)'. '인간이 사물이나 동물을 인간에 비겨 표현하는 것(40)'을 의인화라고 해. '인간 남자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거야(36)'. 인간 남자의 이런 생각을 이용해 적당히 구워삶으면 인간 남자는 고양이를 인간 여자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돼. 인간 남자를 구워삶는 방법을 인간 여자에게 쓰면 안 돼. '인간 여자도 우리 고양이랑 똑같은 방법을 인간 남자에게 써먹기 때문이야(40)'. '인간 여자를 우리 고양이와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도록 해.' '그러면 인간 여자는 늘 고양이 편에 서서 인간 남자에게 맞서는 동맹군이 될 거야. 그다음에는 인간 여자와 함께 안락하고 평화로운 휴전 상태로 살 수 있어(42)'. '인간 아기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이유는 고양이를 자기와 똑같은 인간 아기로 여기기 때문이야(46)'. 인간은 의인화를 잘하기 ...

휴먼스 - 너무나도 그리운 지구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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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일하느라 교육 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교복 입은 애들이 늘 부러웠습니다. 이번 달에 우리 딸이 학교에 들어갔어요. 매일 집에 오면 그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조잘 얘기해주지요. 너무 좋아요. 제가 며칠 집에 못 들어오기라도 하면, 우리 딸은 그사이에 있었던 얘기들을 다 기억해뒀다가 한꺼번에 말해주죠. - 파키스탄 라호르 (11) 우리 애들이 장관이라든가 사업가가 되면 좋겠어요. 근데 얘가 올해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보내줄 돈이 없네요. - 콩고민주공화국 카상굴루 (12) 열두 살 때 자전거를 정말 갖고 싶었어요. 아빠가 한 대 사주셨죠. 얼마 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은 걸 알아챘어요. 아빠는 수리를 맡겼다고 하셨죠. 어른이 돼서 다시 물어봤어요. '아빠, 그 반지 어디 있어요? 제가 똑같은 걸로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그제야 아버지가 털어놓더군요. '그 반지 팔았지. 그때 너 자전거 사느라.' -인도 자이푸르 (34) 우리 아빠는 왜 그렇게 핸드폰만 만지는지 모르겠어요. - 대한민국 서울 (50) 우편배달부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에게 자기 생일이 되면 알려줄 수 있게 말이에요. - 미국 뉴욕 (60) 루시는 차에 치여서 뒷다리를 잃었어요 이미 두 번이나 보호소로 돌아간 적이 있었죠. 엄청 일거리예요. 거의 아이 키우는 거나 다름없어요. 인내심이 아주 많이 필요하죠. 항상 기저귀를 갈아줘야 해요. 시터 구하기가 정말 어렵고요. 하지만 전 얠 1년 반 동안 데리고 있었는데 이제 얘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모두들 루시를 사랑하죠. 그리고 루시도 모두를 사랑하고요. 얘가 꼬리를 흔들 수 없어서 행복한지 어떤지 알 수 없을까봐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루시는 눈으로 내게 말해주죠. -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218) 내 인생은 매일 반복돼요. 이 지역은 물로 둘러싸여 있지만 우리 마을에선 접근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매일 아침 두 시간 산길을 걸어 빙하로 ...

전략가, 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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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는 잡동사니에도 비유할 수 있다. 잡동사니는 다른 사람은 하찮게 볼지라도 그 주인에게는 고이 아끼는 보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소중한 물건이 잡동사니 취급을 받아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일도 종종 있다. 잡초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관점에 따라 잡초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과학적 정의로 볼 때 잡초의 기준은 참으로 어중간하다. (19) 때와 장소에 따라 같은 식물이 잡초가 되기도 하고 잡초가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술적으로는 그렇게 모호하게 분류할 수 없으니 일반적으로는 방해가 되기 쉬운 식물을 잡초라고 한다. (21) 잡초를 '방해가 되는 풀'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하는데, 사실 방해가 되는 풀이 되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다. 잡초를 흔하고 하잘것없는 식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잡초가 어디서나 자라는 건 아니다. 또 모든 식물이 잡초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길가나 밭에서 싹을 틔워 점점 번식해 나가는 일은 식물에는 상당히 특별한 일이며, 방해되는 식물이 되려면 그런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잡초가 되기 쉬운 식물의 성질을 '잡초성 Weediness '이라고 하는데, 이 잡초성이 있는 식물만 잡초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무 식물이나 잡초가 되는 것이 아니다. (24) 잡초는 연약해서 경쟁에 뛰어든다고 해도 강한 식물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잡초는 강한 식물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만 골라서 자라난다. 그런 데가 길가나 인간이 만들어낸 특수한 장소다. (31) 뿌리까지 완벽하게 없애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만큼 잡초는 뽑고 또 뽑아도 자라나지만 잡초를 안전하게 없애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잡초를 뽑지 않는 것'이다. 잡초를 뽑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그리고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잡초는 뽑지 않으면 빠르게 번식한다. 그러면 잡초뿐만 아니라 관목 등 대형 식물이 연달아 자라나면서 덤불이 되고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 숲을 이룬다. 잡초라 불리는 식물은 ...

시인의 말 -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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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박준/문학동네 20121205 144쪽 8,000원 라면 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 1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2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3 너의 음악을 받아 적은 내 일기들은 작은 창의 불빛으로도 잘 자랐지만 사실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죄였습니다 4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다 5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6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7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8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9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10 봄날에는 '사랑의 눈빛이 제철'이라고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11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12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13 「 세상 끝 등...

나의 폴라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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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연구소 유튜브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북극곰과 펭귄을 동경한다면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평생 그 근처에 갈 기회가 없다면 더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지난여름에 소설가 김금희 작가가 남극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대 때부터 꿈꿨던 일이 현실이 된 겁니다. 약 한 달간 남극에서 지낸 일들을 엮어 책으로 냈습니다. 남극에는 지폐나 신용카드를 들고 가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월동 대원들에게 줄 초콜릿과 세종기지 도서관에 놓고 올 《경애의 마음》을 챙겨서 2024년 1월 27일 출발했습니다. 서울에서 파리와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 1월29일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습니다. 인간과 그것이 만들어낸 문명이 없는 자연 속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었던 작가는 2월 1일 아침 10시 40분 드디어 남극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세 시간 뒤 킹조지섬 프레이 기지에 도착했습니다. 말뚝을 대신한 얼음에 보트를 고정해놓은 남극이었습니다. 조디악(Zodiac)을 타고 마침내 세종기지 선착장에 도착하니 대원들이 반겨줬습니다. 작가는 펭귄이 되어 세종기지 구석구석을 둘러봤습니다. "남극 자체가 특별히 보호해야 하는 대륙이지만 그중에서도 환경적, 과학적, 역사적으로 존재 가치가 높아 조심히 접근해야 하는 공간을 남극특별보호구역(Antarctic Specially Protected Area), 줄여서 아스파(ASPA)"라고 부릅니다. 세종기지 근처에 있는 펭귄 마을인 나레브스키 포인트는 한국이 주도해서 제정한 최초의 아스파입니다. 김금희 작가는 펭귄 사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제일 먼저 방문했습니다. 완력을 과시하는 용감한 펭귄이 아니라 느리고 작은 존재가 신비롭게 보여주는 태연함에서 감동과 경이를 느꼈습니다. 떠날 때쯤 다시 만난 아기 펭귄을 보며 콧날이 시큰해졌습니다. "인간처럼 펭귄도 개종 좀 늦게 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존속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 제4차 산업혁명, 경제의 모든 것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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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여러 기술이 한꺼번에 발전하면 혁명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충분한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그런 변화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두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지금은 세 번째 혁명인 정보혁명이 이행되는 과정에 있다. 물론 이런 혁명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건 결단코 아니다. 실제로 산업혁명의 경우 30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정보혁명은 시작된 지 이제 겨우 50년이 지났을 뿐인데 여러모로 보아 아직 끝보다는 시작 단계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16) '특이점 singularity '이라는 용어는 본래 함숫값이 무한이 되는 변숫값을 의미하는 수학 및 물리학 용어였다. 대표적인 예로 물질의 밀도가 무한히 높아지는 블랙홀의 중심을 들 수 있는데, 특이점에 도달하면 기존의 규칙이 깨지기 때문에 다음을 예측하기가 평소보다 더 어려워진다. 최근에는 이 말이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간사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기술의 특이점은 일반적으로 최초의 인공일반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이 실현되어 성인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지적인 과업을 무엇이든 수행할 수 있는 기계가 등장했을 때 벌어질 상황으로 정의된다. 이 기계는 발전을 거듭해 인간보다 훨씬 똑똑한 초지능 Superintelligence 적 존재가 되고,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속도와 규모로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17) 정보혁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정보와 지식이 생산, 자본, 노동, 원자재보다 갈수록 중요해지는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정보는 그 자체로 이미 경제적 가치를 획득했으며, 서비스가 경제 전반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제조업은 2위로, 농업은 3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29) 러다이트 운동가들이나 폭도들은 노동 절감형 기계를 도입하면 대규모 실업이나 빈곤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경제적, 정치적 의견을 표출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지독...

도둑의 도시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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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의 정의에 따르면 '중범죄 혹은 절취 竊取 를 목적으로 건조물 建造物 에 불법적으로 진입하는 행위'를 침입절도라고 한다. '침입절도가 성립하려면 범인이 건축구조에 불법으로 진입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단순 절도, 소매치기, 강도(42)'와는 다른 공간 범죄이다. 영화 〈오션스 일레븐〉, 〈이탈리안 잡〉, 〈인셉션〉 등을 떠올리면 된다. '침입절도는 대도시의 원죄다. 그도 그럴 것이 무단으로 침입하려고 했던 자들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한 건물에 대해 이야기할 게 많지 않을 테니까. 침입자들은 건축의 정사 正史 에 들어가지 못한 일탈적 존재면서도 건축물 자체만큼이나 오랫동안 건축이라는 이야기를 구성해온 필수 요소다(20)'. 사람들이 건축물을 처음 볼 때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정문이 아니라 다락 창문이나 지하 대피소, 허술한 방충망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도둑들의 방식으로 건물을 본 것이다(41)'. '어떻게 보면 도둑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건축을 잘 이해하는 자들이다. 건물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무단으로 들락거리고, 건물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한계를 무시한다. 일단 문이 필요 없다. 벽에 구멍을 뚫거나 천장을 잘라내면 되니까(22)'. 도둑은 '문도 벽도 지붕이나 천장도 없는 세계, 즉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 같다. 침입절도는 다른 세계로(최소한 다른 방이나 건물로) 이어진 흐물거리는 벽이나 갑자기 튀어나오는 입구로 이루어진 매트릭스의 물리적 재현이다. 당장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두 개의 방은 결국 머지않아 이어진다.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도둑은 캘리포니아에서 헐값에 구한 고물 채굴 장비로 터널을 뚫어서라도 두 건물 사이의 이동 경로를 확보한다. 건축물을 오용하고, 남용하고, 건축 목적과는 정반대로 이용함으로써 이들은 건물들의 '진짜' 사용법을 밝혀낸다(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