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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안녕 주정뱅이
컵라면과 소주 한 병, 수제버거와 맥주, 돌게장과 소주, 골뱅이무침과 생맥주, 커피잔에 소주, 등심과 레드와인, 고추장찌개와 위스키...

술 마시는 사연이 구구절절합니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136)'을 삶에서 취소하고 싶어서 마십니다.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그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106)'된 기억을 지우려고 마십니다.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173)' 덕분에도 마십니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176)'아서 취합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168)

'항상 목이 마른 듯 칼칼한 비정규직의 표정(101)'으로 과거를 지우려고 취합니다.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25)'아서 1보다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마십니다. 사연없는 주정뱅이는 없습니다.

'어떤 술자리에서도 결코 먼저 일어나자는 말(271)'을 하지 않는 작가는 소설판에서도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하지 않으며 끝까지 설을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주정뱅이/권여선/창비 20160516 276쪽 13,500원


덧1. 내 맘대로 꼽은 술꾼에 의한, 술꾼을 위한, 술꾼의 책으로 《오늘만 사는 여자》, 《아무튼, 술》,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과 《안녕 주정뱅이》를 추천합니다. 재미있게 읽다보면 시나브로 애잔해집니다.

덧2. 휘진(무엇에 시달려 기운이 빠진), 휘휘한(무서우리만큼 쓸쓸하고 적막한), 무화시킬 수(없는 것으로 하는)라는 말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