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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시대

기본소득 시대
  • 기본소득은 궁핍에 처한 이들을 사회가 돕는다는 도덕 경제(moral economy)의 원리를 배경으로 한 공공 부조(public aid)와 분명히 다르며, 수혜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미래에 당하게 될 각종 리스크를 공유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사회보험(social insurance)과도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혹은 미래의 불안에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것 등의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이들에게 실질적 자유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사회정책 범주이다. (22)
  • 현재의 기술혁신은 2차 산업혁명 당시 만들어지고 정착한 자본-노동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운 일자리들을 양산하였다. 종신 고용은커녕 하루 단위로 고용계약이 갱신되고, 고용의 주체도 애매하며, 업무의 성격이나 일하는 사람의 지위도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상태인 데다 심지어 피고용자로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못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37)
  • 보통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구의 대다수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을 행하고, 그 반대급부로써 얻는 임금으로 자신과 가족의 재생산을 책임진다. 기본소득 옹호론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표준적 모형은 기계화와 자동화의 극단적인 진전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고 고용 관계가 다변화하면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긱 이코노미(gig economy)나 플랫폼 노동의 확산이 그 증거다. (58)
  •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기본소득론이 주로 문제 삼은 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소농적 기반의 해체였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반이 필요했다. 보편적 임노동 체제가 그것이다. (...) 임노동 체제 안에서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소득을 확보할 수 있었던 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을 결성함으로써 자신들의 소득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해나갔다.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임금이야말로 '기본소득'이었던 셈이다. (73)
  • 오래된 담론인 기본소득이 최근에 부상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데다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불평등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인공지능 등 일자리를 사라지게 할 우려가 있는 기술의 발달이다. (107)
  • 기존 복지 체계를 개혁하는 방안으로는 사각지대를 완전히 없애긴 어렵다. 그렇다고 사각지대 때문에 기존 복지를 대체해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기존 복지 수급자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질 수 있다. 많은 경우 정책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이 아닌 것처럼 다른 복지 정책도 모든 문제의 해법일 순 없다. 결국 사회와의 정합성이 높은 정책 대안을 만드는 방법은 각 정책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 뒤에 여러 정책의 장점들을 조합하는 것이다. (114)
  •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은 극히 일부 부자들을 제외한 많은 이들이 사실상 얼마나 불안전하고 취약한 조건하에서 살아가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했다. 그리고 자유란 그저 추상적인 정치 권리(political right)가 아니라 여행, 이동, 식료품, 보건 의료, 교육 등에 걸쳐 우리 일상 근저에 있는 필수불가결한 문제임을 체감하게 했다. 이는 마치 루스벨트 시대에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취약성을 더 절실히 자각해 보다 포괄적 자유와 권리에 대한 담론으로 정치적 논의가 발전한 것과도 흡사하다. (162)
  • 영미권에서는 기본소득을 UBI(Universal Basic Income)라는 약어로 표시한다. '보편'의 의미가 반드시 들어가는 이유는 모두에게 지급한다는 것이 기본소득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173)
  • "모든 사회구성원 개개인에게 조건 없이 생계에 충분한 금액을 현금으로 지속적으로 보장한다." 이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듯 기본소득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이 단순한 아이디어가 복잡한 틀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삶의 모양을 맞춰 넣으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기본소득은 어떤 모양의 삶에든 기회와 시간, 안정감을 제공하면서 자율적으로 삶을 구상해낼 가상의 시공간을 만들어주었다. (...) 기본소득을 설득하고, 기본소득에 동의하는 동료 시민들과 연대하는 과정은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양식이 아니라 각자가 바라는 삶의 모양을 발명해 나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187)
  • 기본소득은 차별을 해결할 수 없다. 다만 차별 없이 보장됨으로써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차별에 저항할 힘을 제공할 뿐이다. (191)
  • 기본소득이 자원을 모두에게 고르게 흘려보내는 분배 정책이라면, 차별을 금지하고 필수적인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은 기본소득이 선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기 위한 경로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선한 사회인지에 대한 규범적인 토론을 우선해야 한다. (192)
  • 모두에게 보장되면서 지속적으로 예측 가능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고용계약의 이해관계 바깥에 있는 시민의 사회적 자리를 만들어준다. 우리 모두에게 노동 이전의 삶, 소비 바깥의 삶의 시간을 보장한다. (198)

기본소득 시대/홍기빈, 김공회, 윤형중, 안병진, 백희원/아르테 20201007 200쪽 11,000원

생존 이상의 가치를 꿈꾸게 만드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하고 싶지 않은 노동을 하지 않도록 해주고, 좀 더 의미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타고난 운으로 건물주가 되거나 그렇지 못해 공무원 시험을 보는 청춘들이 득실대는 세상은 더 보고 싶지 않다.

19세기는 노예제 폐지, 20세기는 투표권 쟁취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본소득의 시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