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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집

아무튼, 술집
이십대를 술집에서 자란 이가 있습니다.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지만 뱃살과 내장지방만큼은 분명히 자랐(11)"다고 합니다. 백팩에 "언제 어디서 쓰러져도 출근할 수 있도록 여벌의 속옷과 셔츠(99)"를 두 벌씩 챙기고 다녔다고 합니다. "위(胃)로 가는 것들은 위로가 된다(12)"며 술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마시는 거라는 간증(간에 새겨진 증거의 줄임말)을 유쾌하게 풀어놨습니다.

"술 당기는 건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만이,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선뜻 응대해준(37)" 술친구는 "밥 때든 잘 때든 마시자고 연락했던 역사(37)"가 있어 애틋합니다. 술친구는 "각종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 모든 증인이 취해 있어 원인도 경과도 알 수 없는 곳.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수록 내가 진상이었다는 사실만 드러나기에 미제 사건으로 종결시켜버리고 싶은 일들이 가득한 곳. 바로 술집(27)"의 흑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술집에 가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면, 꼭 그래야만 한다면, 그건 집에 갈 수 없기 때문(161)"입니다. 특히 "집과 술집 사이에 이물질처럼 회사가 껴 있(127)"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듯이 술집에 가는 거지"요. "해장을 할 수 있는 집이야말로 진정한 술집(67)"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칼국숫집이 "칼국술집(70)"이 되고, "알코올로 마비된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국물"이 "사우나에 입만 담근(102)" 것처럼 시원한 우동집이라면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36)" 술집이 됩니다.

쿠바에 있는 '올인클루시브 비치'라는 곳에 꽂혔습니다. 수영을 하고 "카리브해의 바닷물이 입술에 남긴 짭짤한 소금기(166)"와 함께 럼을 마시면 카리브해 해적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15,000원 정도의 입장료만 내면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니 술꾼에게는 지상낙원이 분명해 보입니다. 언젠가 꼭 가보겠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곳을 술집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나를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사람(149)"과 "평생 술친구(151)"가 되는 것은 행운이겠지요. 그런 술친구와 함께 "바다와 사하라사막과 쿠바(176)" 마저도 거대한 술집으로 만들며 행복하길 바랍니다.

아무튼, 술집/김혜경/제철소 20210621 178쪽 9,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