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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 2019
  • 요즘은 누구라도 '위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영양가 없는 수다꾼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위기라는 단어가 워낙 엄밀하지 못하게 자주 회자되다 보니 이제는 말 자체가 진부해진 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히 진단컨대 지금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 만약 우리가 처한 위기의 특징을 정확히 밝히고 위기의 독특한 역학dynamics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의 교착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정치적 재편성political realignment을 통해 사회 변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3)
  •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조직 차원에서 헤게모니의 대응물은 헤게모니 블록bloc이다. 헤게모니 블록이란 지배계급이 모은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의 연합이며, 지배계급은 이 연합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확고히 한다. 만약 피지배계급이 이 질서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더 설득력 있는 새로운 상식, 즉 대항 헤게모니counterhegemony를 구축해야 하며, 더 강력하고 새로운 정치적 동맹, 즉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해내야 한다. (16)
  •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래 미국과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는 옮음right과 정의justice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을 결합함으로써 형성되었다. 한 측면은 분배distribution에 초점을 맞췄고, 다른 측면은 인정recognition에 초점을 맞췄다. 분배 측면은 사회가 나눌 수 있는 여러 재화, 특히 소득을 어떻게 할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표명한다. 즉 분배 측면은 사회의 경제구조를 다루며, 간접적인 방식이긴 해도 계급 분열의 쟁점을 다룬다. 반면 인정 측면은 사회가 존중과 존경을, 구성원이 되는 것과 소속감의 도덕적 표지를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즉 인정 측면은 사회의 지위 질서에 초점을 맞추며, 지위의 위계 문제를 다룬다. (17)
  •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 미국 정치를 지배하던 헤게모니 블록은 '진보적 신자유주의progressive neoliberalism'였다.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형용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이 헤게모니 블록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세력의 실재하는 강력한 동맹이었다. 동맹의 한 축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류인 자유주의적 분파(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다문화주의, 환경주의, 성소수자LGBTQ⁺ 인권 등)가 담당했고, 다른 한 축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고급스러우며 '상징적'이고 부유한 부문(월 스트리트, 실리콘밸리, 할리우드)이 담당했다. 이 기묘한 커플을 엮어준 것은 분배와 인정에 대한 독특한 일련의 입장이었다. (18)
  • 확실한 헤게모니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불안정한 공백 상태와 정치적 위기의 지속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그람시의 말은 진실로 들린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러한 공백 상태에서는 아주 다양한 병적인 증상이 출현한다.” (39)
  •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은 개인의 태도를 강조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달리 현대 사회의 구조적·제도적 기반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융 자본주의에서의 계급과 지위 문제가 공유하는 공통의 뿌리를 강조해야 한다는 점이다.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은 금융 자본주의 체제를 하나의 통합된 사회 전체로 이해하면서 여성과 이민자, 유색인, 성소수자가 경험하고 있는 피해를 우익 포퓰리즘에 가까운 노동계급이 경험하고 있는 피해와 연결해야만 한다. (46)
  • 우리에게 필요한 유형의 변화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곳, 즉 반자본주의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반신자유주의적인 기획으로부터만 비롯될 수 있다. 그러한 기획은 대항 헤게모니 블록으로 실현될 때만 역사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 이 전망이 현재로서는 먼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우리에게 주체적·객관적 해결책으로서 가장 유력한 선택지는 진보적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진보적 포퓰리즘마저도 안정적인 최종 도달 지점은 아닐 수 있다. 진보적 포퓰리즘도 모종의 새로운 탈자본주의 사회 형태로 나아가기 전에 거치는 중간역으로서 과도기적인 기획으로 끝날 수 있다. (49)
  • 프레이저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 '헤게모니 블록', '분배'와 '인정'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레이저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을 빌려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물론 헤게모니는 그저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지배계급의 세계관이 헤게모니의 자리에 등극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힘을 실어 줄 강력한 사회 세력들 간의 동맹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헤게모니는 지배계급과 동맹을 맺은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의 연합인 '헤게모니 블록'이 가진 주도적인 힘에 의해 지탱된다. (80)
  •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하는 사회 세력들은 지배계급과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에 대한 관점을 공유한다. 여기서 정의로운 사회는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정의된다. 분배의 차원은 '한 사회의 자원과 재화를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당연히 한 사회의 경제구조를 어떻게 유지하고 변화시킬지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정의의 사회경제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인정의 차원은 '한 사회에서 어떤 정체성을 갖고 어떤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인정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인정은 여러 사회 집단과 정체성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적인 지위 질서들을 어떻게 유지하고 변화시킬지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정의의 문화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다. (81)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 2019/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김성준 역/책세상 20210205 96쪽 8,800원

트럼프와 샌더스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붕괴하고 있지만 새로운 대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진단이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 정치를 주도하는 거대 양당의 이념적 차이나 정책적인 차별점은 그리 크지 않다. 극소수의 정치 엘리트 간의 갈등을 각자의 지지 기반이 되는 지역 간의 갈등으로 증폭시켜서 연명한다는 점에서, 이 두 정당은 일종의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에 있기도 하다. 거대 양당이 유권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선택지를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신뢰를 잃은 시민들이 이전에는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탐색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탐색이 트럼프류의 반동적 포퓰리즘으로 향하게 될지, 샌더스류의 진보적 포퓰리즘으로 향하게 될지, 예상하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93)"

우린 새것이 오기는커녕 낡은 것이 요지부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