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들으며

요즘은 비 오는 소리가 참 좋아집니다. 오늘처럼 밤에 내리는 빗소리는 더더욱 그렇답니다. 천방지축 날뛸 때 느끼지 못한 차분함이 있어요. 비 오는 소리를 독차지하고 남몰래 꺼내서 듣는 느낌입니다.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오래된 책을 꺼내 펼쳤을 때 떨어지는 단풍잎처럼 추억이 하나씩 떨어집니다. 첫사랑과 헤어질 때 꼭 오늘같이 비가 내렸던 것 같습니다.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도 생각이 나고 생머리를 흩날리던 그 소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빗소리가 가늘어지며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소리는 잠시나마 순수하게 만듭니다. 이팔청춘으로 되돌아간 것도 아닐 터이고 갑자기개과천선하여 순한 양이 된 것도 아닌데 예전에 느끼지 못한 순수함이 있어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더 착해진다고 하던데 그래서그런가 봅니다. 극장에 앉아 슬픈 영화를 볼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슬쩍 삐져나올 것 같네요.

그렇다고 너무 많이 내려 슬퍼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저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부록의 인생이 비 맞은 땡추처럼 주절거리며 어깨에 놓인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만큼만 딱 고만큼만 내려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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