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촌놈이어서 좋다

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특혜다. 요즘 어린이들은 방학만 되면 농촌체험을 하러 부모님 손을 잡고 줄줄이 도시를 떠난다. 학교와 학원 사이에서 쳇바퀴 도는 비슷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곳은 금대국민학교 애신분교다. 요즘 아이들에게 얘기하면 무슨 소리인지 씨도 안 먹힐 소리지만 사실이다.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아버지 꽁무니를 따라간 입학식에 신입생이라고 한 줄로 서 있지만 산골동네에서 같이 멱감고 소꿉놀이하던 코흘리개 친구들 대여섯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입학 기념으로 책가방을 선물로 받고 그것을 메고 다닌 놈은 내가 유일했다. 밤색 가죽 책가방을 메고 다닐 때 모두가 보자기를 둘둘 말아서 등판에 가로질러 둘러메고 다녔다. 산동네 맨 꼭대기에 사는 놈이 내려오면서 친구들을 하나씩 불러 모아 고개를 하나 넘어 가는 등교 길은 지루하지 않았다. 매일 보는 나무고 풀인데도 지날 때마다 새로워 보였다. 어쩌다 새집이라도 발견하면 오가며 들여다 보고 새끼들은 얼마나 컸는지 보는 게 즐거움이었다.

교실은 달랑 3개뿐이었고 두 개 학년이 한 교실을 반씩 나누어 썼다. 선생님은 두 분뿐이었고 한 학년을 가르치는 동안 옆에 있는 학년은 숙제를 하거나 자습을 했다. 교과서가 없어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를 하면 누런 공책에 옮겨 적거나 그나마 공책이 없는 친구는 눈으로 따라 읽고 손가락으로 책상에 적었다. 이십여 일이 지나서 아버지가 시내에서 국어와 산수 헌책 3권을 사 오셨다. 우리는 그것을 서로 돌려 보며 일학년을 보냈다. 첫 통지표는 모두 '우'였다. 동네 형은 우등상은 안 받았느냐고 물었다. 우등상이 뭔지 모르는 나는 통지표에 모두 우를 받으면 주는 상인 줄 알았다.

방학이라고 해봤자 특별한 것이 없다. 학교에서 보내던 시간만큼 더 놀면 그만이었다. 냇가 옆에 있는 개복숭아 나무에서 설익은 복숭아를 따서 물속에 던져 넣고 누가 먼저 꺼내 오나 자맥질을 하면서 온종일 보냈다. 그 냇가에는 전교생의 절반은 항상 나와서 발가벗고 멱을 감았다. 입술이 파래지도록 놀다 추우면 그대로 누워 몸을 말리면 됐다. 방학숙제를 한 기억이 없다. 교과서도 없는 판국에 숙제를 내 줄 형편이 안됐다. 그렇게 여름 내내 멱감고 매미 잡은 기억만 있다.

이학년이 됐지만 교실을 옮길 필요가 없었다. 삼학년이 된 언니들이 옆 교실로 가고 새로 들어온 신입생 몇 놈이 그 자리에 대신 앉아 우리가 물려준 헌책으로 철수와 영이와 바둑이를 따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구구단을 한쪽 칠판에 적어 놓고 산수 시간만 되면 장단에 맞춰 이단부터 구단까지 흥얼거렸다. 한 달은 족히 그랬던 것 같다. 그해 봄이 다 가기 전 신통하게도 내가 맨 처음으로 구구단을 깨우쳤다. 만화책은 옆집-담장을 사이에 둔 그런 옆집이 아닌- 형이 어디서 구했는지 다 떨어진 소년 월간지를 들고 낄낄대고 있기에 옆에서 같이 처음으로 보게 됐다. 이런 신기한 세상이 있다는 걸 난생처음 알게 됐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항상 재미있었다. 그 감동과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해 겨울 방학에 시내로 이사를 했다. 개학이 돼 교실에 가보니 애들이 너무 많아 당황했다. 교과서도 공짜로 나눠 주었다. 신입생이 돼 여름 방학에 서울에서 내려온 사촌 동생은 오후반이라고 했다. 서울은 애들이 너무 많아 한 교실에 다 앉아 배울 수가 없어 오전 오후로 나눠서 등교한다고 했다. 남의 나라 얘기처럼 신기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시골생활이자 여름 방학이다. 그 후 학창생활은 다른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나와 같은 어린 시절을 경험한 친구들이 주위에는 없다. 교과서가 없어 헌 책을 돌려 봤다는 얘기를 듣는 이들은 껄껄 웃지만 그런 경험을 한 나를 조금은 부러워하는 눈치다. 시골에서 자라다 도시로 나와 공부한 촌놈에게 다시 돌아갈 고향 같은 여름 방학의 기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나는 애신분교에 입학했었다는 사실이 즐겁다. 나는 촌놈이어서 좋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방학 때만 잠시 뛰어노는 아이들은 과연 나이가 들면서 무엇을 그리워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기억들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방학 때 서울서 동생이 들고 올 종합선물세트를 기다리는 설레임이나 말린 고사리며 옥수수를 싸들고 올라가는 동생의 기쁨을 모른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런 여름 방학을 만든 모든 것이 우리의 죄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