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기행

막걸리 기행
뜨거운 여름, 할머니는 입맛이 없다며 막걸리에 밥을 말아 드시곤 했다. 어린 나이에 그 맛이 어떨까 궁금해서 수저로 떠먹었다. 시금털털한 맛에 이내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그렇게 막걸리를 처음 접했다. 촌스럽게 쓴 대포집 간판이 요즘 편의점만큼이나 널려 있던 시절이었다.

민속주점에서 동동주와 고갈비를 먹으며 대학을 다녔다. 생맥주 한 잔에 거금 500원씩이나 하던 시절인지라 학우들이랑 잔디밭에 둘러앉으면 어김없이 막걸리가 등장하곤 했다. 그렇게 마셨던 막걸리는 다음 날 아침이면 바지에 튄 막걸리 자국만큼 개운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막걸리는 원래 골때리는 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산에 갈 기회가 아니면 좀처럼 찾지를 않게 됐다.

70년대 후반까지 술 소비량의 70%를 유지했던 막걸리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됐다. 막걸리를 속성으로 발효시키려고 '발열제인 카바이트를 비닐봉지에 싸서 술통에 넣어 속성으로 발효시킨 카바이트 막걸리'가 유통되면서 그 인기가 급전직하로 떨어지게 되었다. 골때리는 술이라는 근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막걸리 기행》은 일본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지은이가 2007년 일본에서 먼저 낸 책이다. 그러고 보면 막걸리 열풍은 일본에서 일어나 원조국가로 역수입되지 않았나 싶다. 2005년 가을부터 전국을 돌며 새벽술과 낮술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마시며 쓴 지은이는 놀랍게도 여성이다. 술 욕심에 지나칠지 모르는 소소한 스케치를 오히려 여자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과 흥취를 세심하게 그렸는지 모르겠다.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돌며 만난 막걸리는 하나같이 마음으로 빚는 술이다. 막걸리 한 병에 있는 유산균이 요구르트 100병에 맞먹는 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 사실은 주당들에게 막걸리는 보약이라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이승에서 시바스리갈로 마지막 이별주를 마셨던 독재자도 막걸리를 좋아했단다. '1965년에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시키고 밀가루 막걸리를 정착시키려고 한 장본인'인 독재자는 정작 자신은 쌀로만 빚은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우리 현대사의 슬픈 단면으로 빚은 막걸리가 아니었나 싶다.

《막걸리 기행》은 참 불친절한 책이다. 물맛만큼 다양하고 인심처럼 풍성한 막걸리를 찾아다닌 저자는 그 주점이 어딘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어디쯤에서 버스를 타고 어느 방향으로 몇 분 정도 가다 내려 지나가는 동네 사람에게 물어 그 막걸리 집에 갔다는 게 전부다. 이쯤 되면 성질 급한 사람은 지은이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지도 모른다. 막걸리집을 찾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인심도 느끼고 정에 먼저 취해보라는 은근한 권유라는 걸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알 게 됐다. 물론 책 뒷부분에 대포집 주소와 연락처가 있지만 내비게이션 없이 아날로그형으로 떠나는 것이 막걸리와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걸리를 만드는데 물의 영향도 있지만, 맛을 좌우하는 것은 온도, 시간, 마음에 있다고 한다. 마치 배탈 난 손주새끼 배를 손으로 쓰다듬던 할머니의 약손같이. 혹은 너와 나만 아는 한여름 바닷가 추억처럼.

오늘, 추억 하사발 하시죠.

막걸리 기행/정은숙/한국방송출판 20100317 352쪽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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