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의 정류장,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를 위한 휴일 없는 사랑방

People of Earth’s Station 지구인의 정류장,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
지구인의 정류장

2020년 12월20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캄보디아 여성노동자 누온 속헹((Nuon Sokkheng, 31) 씨가 자다가 숨졌습니다. 그날 밤 김이찬 활동가는 누군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돈다고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다음날, 한국에서 일하고 캄보디아로 돌아간 한 노동자가 김이찬에게 숨진 사람이 누군지 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속헹의 동료가 전한 당시 정황은 이렇습니다.

12월18일부터 20일까지 일을 쉬기로 했는데 너무 추워서 5명 중 3명은 18일부터 다른 곳에 가서 잤고, 19일 토요일 저녁에는 다른 한 명도 친구 집으로 갔다. 비닐하우스 내 조립식 패널 가건물은 바닥만 전기필름으로 난방을 하는데 추위 속에 누전차단기가 계속 내려갔다. 금요일 밤에는 속헹과 동료 한 명이 밤새 자지도 못하고 차단기를 번갈아 올려야 했다. "너무 추워요. 전기가 없어요. 끊어져버렸어요. 나는 나가요. 당신도 내 친구 집에 가요. 여기 있지 말고. 전기가 없으니까… 너무 추우니까 있을 수가 없어요. "토요일 저녁, 동료가 속헹에게 자신의 친구 집으로 같이 가기를 권했지만, 속헹은 자기는 괜찮다며 숙소에 남았다. 다음날 오후 4시께, 속헹은 숙소로 돌아온 동료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1

당시 포천지역은 한파가 몰아쳤고, 동료 노동자들은 지난 며칠간 숙소에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숨진 속헹 씨 숙소에는 3주 뒤 출국하는 프놈펜행 항공권이 있었습니다. 만약 속헹 씨가 한국에 오지 않았거나, 적어도 숙소가 비닐하우스만 아니었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겁니다. 속헹 씨 죽음은 500일이 지나서야 간신히 산업재해로 인정받았습니다.

김이찬 활동가는 지구인의 정류장의 대표입니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2009년 말 경기도 안산 지역에서 이주노동자에게 비디오 교육을 하는 영상 공부방으로 출발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시민도 주민도 아니잖아요. 외국인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지구인'이라 하고, 이곳이 계속 머무는 곳이 아니니깐 '정류장'이라고 했죠"2라며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의 실상을 세상에 처음 알렸습니다.

서울대 법대 운동권 출신인 김이찬 대표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었습니다. 캄보디아 농촌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를 전해 듣고 상담을 하며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고 시작했습니다.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대화하려고 캄보디아어를 배워 임금을 못 받거나 성폭력을 당한 노동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단체 후원금 중에서 월 150만 원의 활동비를 받으며 월세방에 살고 자전거로 이동합니다. "성폭행당한 노동자 구제활동을 하고, 병원에 긴급히 가야 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한 해 150~200명 정도를 새로 만난다"3고 합니다. 성공이나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젊은 노동자들을 안내하는 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속헹 씨의 죽음 이후에도 농업 이주노동자 현실은 변화가 없습니다. 김이찬 대표는 "경남 밀양 박아무개씨가 운영하는 농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비닐하우스 숙소를 제공하고 1인당 28만원씩 임금에서 합법적으로 공제하고 있다. 냉방시설이 없고 난방장치는 전기패널 한 장씩만 깔려 있다"4며 일부 이주노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의 노예 같은 삶은 이주인권 활동가이자 연구자인 우춘희가 쓴 《깻잎 투쟁기》가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지구인의 정류장에는 "냠 바이 찌어모이 크니어!(같이 밥 먹자)"하며 이주노동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김이찬 대표가 있습니다. 지구의 정류장엔 휴일이 없습니다. 낮엔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고 상담합니다. 저녁 식사 뒤 다시 일에 파묻혀 주로 이주노동자들의 진정서를 쓰는 역무원들이 있습니다. 이주민과 장애인 인권 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최정규 변호사는 지구인의 정류장이 이주노동자 문제의 최전선에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그 어떤 이주민 단체보다 확장성 있는 이슈를 선점해요. 사례가 많기 때문이죠. 이주노동자 관련 언론 보도를 모니터링하면 지구인의 정류장이란 이름이 빠지지 않아요. 이주노동자들의 외침은 대부분 묻히곤 하죠. 감독님은 그 외침을 어찌 됐든 살려내요. 옆에서 보면 하나하나의 외침을 진정성 있게 듣는 것 같아요. 쉽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5

지구인의 정류장은 소수자, 이주자, 당사자들이 참여하여, 소통하고, 반인권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는 자조적인 문화활동을 지원하는 사랑방입니다.6 이주노동자는 대체로 3D업종에 종사하며 단순노동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힘들고 곤란한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사람이 온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입니다. 이주노동자의 삶과 꿈이 고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지구인의 정류장에 있는 역무원들이 한가해지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덧. 2023년 2월 23일 오후 5시쯤 전북 고창군 흥덕면의 한 주택에서 태국인 노동자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추운 날씨에 밀폐된 방 안에서 장작을 때 난방하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꾸준히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1. 한겨레21 20210201 속헹이 죽고 농장주는 과태료 30만원을 냈다
  2. 한겨레 20141113 “이주민 삶 다큐 만들다 함께 살 보금자리 찾게 됐어요
  3. 한국일보 20230201 민정수석의 동기는 왜 이주 노동자들의 ‘대부’가 되었나
  4. 매일노동뉴스 20211209 한 달에 '이틀' 쉬며 깻잎 따고 '비닐하우스'에서 잔다
  5. 경향신문 20201212 이주노동자 잇는 ‘지구인의 정류장’엔 휴일이 없다
  6. 다음세대재단 지구인의 정류장 - 인권운동 및 활동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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