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오언 - 산업혁명기, 협동의 공동체를 건설한 사회혁신가

Robert Owen
로버트 오언은 1771년 영국 웨일스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858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언은 7세에 학교에 입학했지만 9세에 학교를 떠나 일을 하게 된다. 10세가 되었을 때 런던으로 와 18세까지 점원으로 일한다. 18세에 섬유 기계 공장의 주인이 되고, 29세에 뉴 레너크New Lanark에 있는 큰 면화 공장의 경영자가 된다.

오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기는 초기 산업혁명 시대로 온갖 빈곤과 학대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오언이 태어나기 1년 전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의 특허권을 얻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1776년에 출간됐다. 18세 되던 해인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터졌고, 면화 산업의 발전을 가능케 했던 새로운 기계들이 널리 도입되던 시기였다.

뉴 레너크의 운영권을 쥐게 된 1800년부터 전국 통일 노동조합이 갑자기 종말을 맞았던 1834년까지 오언은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뉴 레너크는 공장 개혁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중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1830~1834년의 사건들을 보게 되면 노동계급이 최초로 이루었던 폭넓은 단결 운동의 지도자'였다. '영국에서 사회주의 운동과 협동조합 모두 공히 그 최초의 체계적인 주창자는 로버트 오언이었다(47)'.

오언은 1800년 1월 뉴 레너크 공장의 최고 경영자가 되자 '뉴 레너크를 단순히 성공한 공장이 아니라 교육 그리고 도덕적 물질적 개혁에 관련된 사회적 실험들을 연이어 계속 펼쳐나갈 실험실로 삼고자(111)' 했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 중에 아이들은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였다. '여섯 살짜리 심지어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 정규적으로 고용하여 딱 한 번의 휴식 시간만 준채 14시간 혹은 그 이상을 부려먹는 것이 관습이었던 당시'에 오언은 '자기의 공장에 열 살 이하의 아이들은 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고용 금지 연령을 열두 살까지로 올리기'를 원했다. '심지어 그는 열네 살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본격적인 노동을 절대 시키지 말아야 한다(167)'고 믿었다. 오언은 성인이건 소년이건 10시간 노동제 운동을 하였고, 말년에 가면 8시간 노동을 옹호했다.

오언은 자신이 고용한 이들의 아이들을 교육했고, 학교를 만들었다. 학교는 마을로 전입하는 모두에게 개방했다. '오언은 학교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으며, 이 마을 전체가 경제단위인 것만큼이나 하나의 교육 단위로서 설계되었다. 영아 학교를 위해 아예 건물 하나를 따로 두게 되어 있고, (...) 그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위해 훌륭한 시설을 갖춘 학교 건물이 따로 있었다'. '성인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자신들의 성격에 입은 손상을 교육으로 회복하고 또 아이들은 더 나은 방식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215)'이 오언의 목표였다.

'오언주의의 길과 노동조합주의의 길은 1830년에서 1834년의 기간 동안 하나로 합쳐졌지만, 1834년 이후에는 급하게 찢어진다.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오언의 짧았던 지도력도 급작스럽게 종말을 고한다. 이제는 협동 운동 대신 차티스트 운동이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복음이 된다(343)'. 이후 24년을 더 살았지만, 죽기 전 5년간은 심령술에 빠진 노망기였다.

오언은 '사회주의 기초가 사람들 사이의 연합과 결사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협동의 역량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서 이것을 사회주의의 신념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사회주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여이며, 이러한 생각은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오늘날에 비로소 그 의미와 중요성이 제대로 음미되기 시작했다(48)'.

'당시에 태동한 산업혁명은 광범위한 시장경제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었으며, 모든 이들이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며 무한 경쟁을 벌이는 것만이 산업사회를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방법이라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신앙도 나타나고 있었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 즉 무한 경쟁의 비인간적 시장경제의 반대말로서 나타난 이름이었다(9)'. 팬데믹 이후 새로운 사회는 '200년 전 로버트 오언이 그의 온 인생을 바쳐서 외쳤던 메시지가 다시 살아온다. 인간의 본질은 경제적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다(13)'.

로버트 오언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뉴 래너크의 실험은 동업자들과 종교적 갈등을 겪은 끝에 허무하게 중단됐다. 오언은 '급작스러운 혁명(118)'을 시도했던 것이 아니다. '손으로 하는 숙련노동은 대개 기계로 대체될 것이며, 이에 따라 각자 특화된 노동을 해야 할 필요도 사라지게 된다. 세세한 노동 분업 그리고 세세한 이익의 분화라는 것은 곧 빈곤, 무지, 온갖 종류의 낭비, 사회 전반에 걸친 반목, 범죄, 비참, 사람들의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배치성 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266)'라며 노동 분업의 여러 해악을 없애려고 했다.

로버트 오언(17710514~18581117)은 협동Co-operation이라는 원리를 제시했고, '높은 임금과 좋은 고용 조건이 경제적이라는 이론(166)'을 주장했다. '생산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문제는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생산된 것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263)'라는 사회주의 운동을 개척하였다. 사회주의 운동과 협동조합을 주창한 로버트 오언의 공상은 팬데믹을 지나며 더 이상 공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G.D.H. 콜George Douglas Howard Cole/홍기빈 역/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KPIA) 20170210 416쪽 1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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