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과학을 통해 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과학적 사고에서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규칙들을 세우지만 이후 그 규칙들은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토록 자유롭게 지식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1)
  • 아인슈타인은 순식간에 앞서갔다. 먼저 고전역학에서의 움직임, 즉 중력이 없는 상태에서 물체들이 보이는 움직임에 대한 설명을 상대화했고(특수상대성이론), 그다음에 중력이 있는 상태에서의 움직임으로 넓혀갔다. 이것이 '일반상대성이론'이다. (36)
  • 공간은 이렇게 일차원 물체인 루프들로 짜여 있으며, 이 루프들이 세 개의 차원상에서 서로 엮이면서 삼차원의 직물을 형성하게 된다. 티셔츠 표면도 멀리서 보기에는 매끄러워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돋보기로 보면 실을 가닥가닥 셀 수 있는 것처럼, 공간 역시 우리 눈에는 연속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매우 작은 차원에서는 각각의 루프를 셀 수 있게 된다. (59)
  • 과학계는 동화 같은 곳이 아니다. 아이디어를 도둑맞는 일은 다반사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빼앗거나 가장 중요한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등 새 아이디어를 수립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려고 기를 쓰고 있다. (64)
  •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그저 과학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을 통해 발전된 세계관이 분명하고 정확한 의미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여러 해석을 가질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들 역시 어느 정도까지만 진실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80)
  • 과학적 사고의 힘은 '실험', '수학', '방법론' 따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과학적 사고의 특징, 즉 스스로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것은 자신이 확언한 내용까지도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며, 자신의 신념은 물론 가장 확실했던 신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시험대에 올리는 능력이다. (81)
  • 과학의 힘은 과학적 개념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다. 과학은 결코 과학이 내린 결론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가 지식이라는 매우 취약한 기반 위에서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기반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82)
  • 과학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과학이 확실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 답 중 가장 나은 것을 해답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99)
  •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방대하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를 전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확신이 아닌 의심이다. (...) 과학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확신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100)
  • 말하자면 시간에 대해 생각할 때 우주의 일생에 맞춘 우주 시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주 속의 모든 물체는 각각의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간에는 지역적인 조건이 있다고 봐야 한다. 마치 일기예보 같은 상황이다. 각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날씨처럼 시간도 그렇다는 것이다. (142)
  • 코페르니쿠스 혁명만 봐도 그렇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후에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뒤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전진할 수는 없다. (143)
  •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뉴턴의 이론적 도식이 무한히 작은 차원을 다루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뉴턴의 이론은 훌륭한 전략이었지만, 거시적인 현상,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만 유효했다. (151)
  • 우리는 이 세상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각각의 물체가 다른 물체에 비해 변화하는 방식일 뿐이다. 최근 기초물리학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존재를 제외한 새로운 세계관이 정착되고 있다. 오래전 과학적 세계관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던 것처럼, 관용적인 공간과 시간의 개념 역시 기초물리학의 범위 안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물체들 간의 관계라는 개념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153)
  • 결국 '시간'은 그저 '엔트로피화의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관찰되는 방향을 시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물체가 낙하하기 때문에 아래라는 개념이 생겨나듯,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아래는 '물체가 낙하하는 방향'이고, 시간은 '열이 식는 방향'인 셈이다. (170)
  • 끈이론은 루프이론보다 훨씬 더 야심 찬 목표를 가지고 있다. 양자중력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해답을 찾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물리학의 모든 힘과 입자들을 통일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끈이론은 양자중력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합할 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모든 기본 상호작용을 통합하고자 한다. '모든 것의 최종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다. (186)
  • 루프이론, 끈이론, 그리고 '표준모형 이후의 물리학'에 포함되는 모든 이론들은 사변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것은 과학과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과학을 후원하는 것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198)
  • 끈과 루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보자면, 이 둘에 대한 오늘날의 기초연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구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좋은 아이디어들이 제시되었고 이론들도 발전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정답일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인 것이다. (201)
  • 지금이 세상을 만든 것은 기존의 관념에 맞서는 이전 세대의 반란이며, 다르게 생각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현실은 그들의 성취된 꿈이다. 그러니 미래를 겁낼 이유가 없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반항하며, 다른 세계를 꿈꾸고, 그것을 추구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14)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et si le temps n'existait pas? 2014/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김보희 역/쌤앤파커스 20210510 220쪽 16,000원

'과학적 사고란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방대하고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의식하는 것'이라는 과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인상 깊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그저 과학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을 전제로 과학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 답 중 가장 나은 것을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루프양자중력의 대가다운 깨달음을 엿봤다. 특히 더불어 탐구하는 세계에서 아이디어에 관한 '생각의 출처(66)'까지 고민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이해하기 어렵다. 끈이론과 루프이론은 시공간에 대한 관념을 통째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후에도 오랫동안 천동설을 믿었는데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하루아침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시공간에 관한 관념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양자중력이라는 라면을 맛보기는 어렵지만, 그 냄새는 아주 조금 맡을 수 있다.


덧. 오탈자
  1. 123쪽 12행 일방상대성이론 → 일반상대성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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