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리 블라이, 정신병원을 잠입취재하고 세계일주에 도전한 탐사보도 개척자

Nellie Bly in a photo dated soon after her return from her trip around the world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넬리 블라이

엘리자베스 제인 코크런(Elizabeth Jane Cochran)은 1864년 5월 5일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주 코크런즈 밀즈(Cochran’s Mill, Pennsylvania)에서 태어났습니다. 1880년 엘리자베스는 피츠버그로 이사했습니다. 어머니를 도우며 일자리를 찾던 엘리자베스는 1985년 1월 〈피츠버그 디스패치 Pittsburg Dispatch〉에 실린 여성 혐오 칼럼을 보고 반박문을 써 보냈습니다. 그 글이 편집자인 조지 매든(George Madden)의 눈에 띄어 기자로 채용됐습니다. 여기자는 필명을 쓰는 관례에 따라 엘리자베스에게 넬리 블라이(Nelly Bly)라는 필명을 붙였지만, 기사 마감 직전에 'Nelly'의 철자를 "Nellie'로 적는 바람에 평생 'Nellie Bly'라는 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여성 노동자에 관한 탐사보도를 연재했지만, 현지 공장 소유주들이 불만을 나타내자 여성면을 할당받았습니다. 일에 흥미를 잃은 넬리 블라이는 1886년 초 멕시코로 떠나 6개월 동안 정치, 문화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 멕시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껴 귀국했습니다. 다시 문화면 취재로 배정되자 1887년 3월 30일에 마지막 기사를 쓰고 〈피츠버그 디스패치〉를 미련없이 그만뒀습니다.

뉴욕으로 이사한 넬리 블라이는 여러 신문사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당했습니다. 1887년 9월 22일 〈뉴욕월드 New York World〉에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뉴욕 블렉웰스 섬(Blackwell’s Island)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취재해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정신병원은 특히 여자 환자들이 수용된 병동에서 환자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정신병원에 잠입해 열흘 동안 '정신병원 B.I.H.6(Blackwell's Island, Hall 6)이라고 쓰여진 환자복을 입고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경험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환자들에 대한 잔인한 학대와 인권유린을 '정신병원에서의 10일(Ten Days in a Mad-House)'이라는 17부작 기사로 폭로했습니다. 시 당국은 병원 조사에 착수했고, 연간 예산을 100만 달러 증액하기로 했습니다. 학대한 직원이 해고되고, 이민환자를 위해 통역가를 고용했습니다. 미국 전역에 있는 많은 수용자들이 석방되거나 이송되며 더 나은 처우를 받게 됐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이 기사로 유명세를 탔고, 탐사보도를 개척하며 〈뉴욕월드〉의 정식 기자가 됐습니다.

1889년 가을 〈뉴욕월드〉 신사옥 건립에 맞춰 넬리의 세계일주 아이디어를 특집 기사로 기획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쥘 베른(Jules Verne)이 쓴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 기록을 깨며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여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1889년 11월 14일 오전 9시 40분 30초, 넬리 블라이는 드레스 차림에 작은 여행가방 하나만 가지고 75일 일정으로 증기선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호를 타고 뉴욕을 떠났습니다. 프랑스를 지날 때는 아미엥(Amiens)에서 쥘 베른 부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여행을 시작한 지 68일 만인 1890년 1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뉴욕월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저지까지 전세 열차를 제공했습니다. 1890년 1월 25일 오후 3시 15분, 72일 6시간 11분 14초만에 넬리 블라이는 세계일주를 완주했습니다.

1895년 넬리 블라이는 40세 연상인 백만장자 로버트 시먼(Robert Livingston Seaman)과 결혼했습니다. 로버트가 1904년에 사망했을 때, 넬리 블라이는 잠시 회사 대표가 돼서 회사 복지를 개선하고 주급을 보장해주었습니다. 1909년 재정 문제로 몇 년간 법정에서 시간을 보내다 회사를 정리했습니다. 1911년 〈뉴욕이브닝저널 New York Evening Journal〉 기자로 돌아왔고, 여성 참정권에 관한 기사를 다뤘습니다.

1914년 오스트리아로 사업자금을 구하려고 떠나긴 직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전선을 취재하려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저널리즘의 세계로 돌아왔습니다. 종군기자로 유일한 여자였던 넬리 블라이는 동부전선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귀국 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고아들의 대모 역할과 입양을 주선하는 사회사업을 했습니다.

1922년 1월 9일 〈뉴욕이브닝저널〉에 넬리 블라이가 쓴 마지막 글이 실렸습니다. 세계일주를 마친지 32년이 지난 1922년 1월 27일 오전 8시 35분, 폐렴으로 병세가 악화돼 눈을 감았습니다. 남은 재산은 고아들을 돌보는 데 쓰게 했습니다. 넬리 블라이(18640505~19220127)가 사망한 날, 20세기 가장 저명한 언론인으로 꼽히는 아서 브리즈번(Arthur Brisbane)은 '미국 최고의 기자'라는 헌사를 바쳤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저널리즘에 영감을 준 탐사보도기자였으며, 작가이자 자선사업가였습니다.


참고자료
  1. 넬리 블라이,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10일》(모던아카이브, 2018)
  2. 넬리 블라이, 《넬리 블라이의 세상을 바꾼 72일》(모던아카이브, 2018)
  3. Nellie Bly: Around the World
  4. Bly, Nellie (1864-1922)
  5. Inside Nellie Bly’s 10 Days in a Madhouse
  6. Nellie Bly’s Record-Breaking Trip Around the World Was, to Her Surprise, A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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