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도보여행가인 김남희 작가는 '모험심이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고, 잠귀가 밝아 잠자리를 가리는데다가, 안 먹는 음식이 많고,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부담스러워하는 성격(240)'이랍니다. 그런데도 여덟 살 때 혼자 기차를 타고 포항에서 대구로 떠난 것이 첫 여행이었답니다. 서른넷에 회사를 그만두고 배낭을 꾸린 후 20여 년이 되도록 유목민으로 살았습니다. 책은 코로나19가 창궐해서 여행하지 않는 여행작가가 됐을 때 얘기입니다.

싱글, 여성, 여행작가. 근사한 조합이지만 '자유로움은 경제적 불안함과 동의어'입니다. '외로움과 불안함을 반반씩 섞어 자유 위에 덧바른 삶(28)'입니다. 바이러스가 세상을 멈췄지만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한 매일 산책을 하며, 꾸준히 달리기를 하며' '조금씩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멈추지 않(51)'았습니다. 방과후 산책단, 방과후 글쓰기단, 에어앤비를 하며 버티다 보니 타인의 호의가 쌓였습니다.

통장이 텅장으로 변했지만 전염병에 맞서는 연대의 백신 같은 택배 상자가 배송되는 호의가 이어졌습니다. '바이러스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포에 작은 마음을 모아 맞서는 사람들'의 '우아한 연대(203)'였습니다. 덕분에 전생에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자(65)'라서 냉장고를 포기하지 않았고, '도예가 밑에서 뼈빠지게 일만 하다 제 그릇 하나 구워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79)'난 것 같아 사 모은 그릇으로 밥상을 차렸습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은수저로 밥을 먹는 사람(40)'도 됐습니다.

서른을 넘긴 후 나는 늘 혼자 살아왔는데, 정말로 혼자였던 날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매 순간을 타인의 친절에 기대어 살아왔다. 지친 무릎이 꺾이려고 할 때마다 일으켜세워주던 손들이 있었다. (8)

코로나 이후 집에 갇혔던 시간 동안 나는 삶을 통틀어 가장 많은 이들을 만났다. 멀리 가지도 못했는데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내게 호의를 베푸는 걸까. (...) 아마도 내게 일어나는 선의의 순환을 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 안의 선한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그 마음은 다른 이에게 오롯이 전해진다. 그 선의를 받은 이가 나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다시 선의를 베푼다. 마치 커다란 고리 위에서 물방울이 떼구루루하고 굴러가듯 그렇게 선의가 이어진다. (275)

오늘도 작은 호의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건너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삶의 품격을 지키며 남은 생을 살아내는 사람이고 싶다.(14)

'세월이 흐르며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보다 무서운 건 마음의 근육이 사라지는 일(107)'입니다. '모험이 없는 삶에도 조용하지만 끈질긴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259)'습니다. '젊은 날에 업어주는 삶이었다고 믿었던 그 순간들마저도 실은 업히는 삶(9)'이었습니다. 여행 다닐 때마다 기대었던 누군가의 호의와 '그렇게 받은 마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119)'려고 합니다.

'상대의 가장 아름다운 면을 끌어내는 사람(120)'이 모인 '旅行인 동시에 女行(131)'인 세상이 되면 '헌법 1조는 누구도 혐오할 권리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186)'입니다. '우리는 아름답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해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을 수는 있으니까(276)'요. '급류가 넘실거리던 거센 강 앞에서는 잠시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숨 한번 깊이 들이쉬고 일어나며 치맛말기를 쓱쓱 접어올리고 그 강을 건 (255)'너기 바랍니다.

작은 호의를 주고받고 다정함을 잃지 않는 공화국이라면 헌법 1조는 "모든 생명은 멍때릴 권리가 있고, 모든 존재는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일 겁니다.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김남희/문학동네 20211115 280쪽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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