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카타의 빈민가는 주소보다 시급한 것이 많아 보였다. 위생 설비, 깨끗한 물, 의료 서비스는커녕 장마철 호우를 피할 지붕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소가 없어 빈민가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주소가 없으면 보통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다. 은행 계좌가 없으면 저축을 할 수 없고 대출도 받을 수 없으며 연금도 받을 수 없다. (...) 주소가 생긴 체틀라 사람들은 이제 수바시즈와 그의 팀의 도움을 받아 바로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처음으로 개인 직불 카드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주소가 신원을 증명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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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의 이점은 현실에서 거의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먼저 도로명 덕분에 유권자 등록과 선거구 책정이 쉬워지면서 민주주의가 증진되었다. 둘째, 주소 없는 지역이 범죄의 온상이 되곤 했던 터라 도로명은 치안 강화에도 도움을 주었다. (다소 부정적인 점이 있다면 주소가 반체제 인사들을 찾는 데도 유용하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동안 수도와 전기회사들은 요금을 징수하고 설비를 유지하기 위해 기업마다 나름의 시스템을 고안해 왔는데, 도로명 주소는 그런 업무를 훨씬 수월하게 해 주었다. 넷째, 각국 정부는 납세자들을 더 쉽게 찾고 세금을 더 쉽게 걷을 수 있게 되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도로명과 소득 사이에는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는데, 도로명 주소가 있는 지역은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소득 불평등 수준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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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지도가 완성되지 않은 지역은 전 세계 70퍼센트에 달한다. 그중에는 인구가 백만이 넘는 도시도 많다. 그런 지역이 우연찮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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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우체국 직원이었던 로버트 문이 우편번호(zip code)를 만들었다. (Zip은 zoning improvement plan(구획 정비 개선 계획)의 약자다.) 문이 상사에게 우편번호를 처음 제안한 때는 1944년이었는데, 자그마치 20년 동안 로비를 벌인 끝에야 그의 아이디어가 수용되었다고 한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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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가는 국가 형성 이전에 자국이 어떤 사회인지, 자국민들은 어떤 이들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번지가 탄생하기 이전의 세계는 집들이 어두컴컴하고 덧문이 닫혀 있어 밖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데다가 길을 찾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책에서 글을 읽어 내려가듯 도시에서 도로명과 건물 번호를 찾아 읽는다. 주소가 있기 전까지 국가는 자국민에 대해 까막눈과 다름없었으나 번지가 생기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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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를 매기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작업이다. 번지가 막 도입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집에 번호가 매겨짐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부정당했다고 느꼈다.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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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를 지워 버리는 일은 힘없는 자들이 곧 인간성을 되찾는 일이었다. 남자들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이를 몽땅 뽑아 버리고 엄지를 잘라 버렸던 것처럼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힘을 행사하고자 한 것이다. 탄트너가 설명한 것처럼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 집을 훼손하는 행위는 "주소를 강요하는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우는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이었다." 국가가 집에 번호를 매기지 못하면, 징집을 하지 못하면, 찾지 못하면, 국가가 그들을 지배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그들은 진정한 자유인이 되길 바랐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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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가인 셸턴은 이러한 문자 체계의 차이를 서양인과 일본인이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셸턴의 분석에 따르면,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선을 보는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도로(선)에 집착하고 도로에 이름을 붙이는 관행을 고집해 왔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도시계획에서 도로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낮기 때문에 어떤 이름이 부여하는 명성을 도로가 담아낼 수 없다." 셸턴은 일본인들이 오히려 지역, 즉 블록에 더 주목한다고 보았다.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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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한국인들은 모두 새로 도입된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택시 기사들은 새 도로명 주소를 구(舊) 주소로 바꾸어 사용했고 집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반발이 일시적 현상일 수도 있다. 도로명 주소 체계만 보고 자랄 다음 세대가 성인이 되면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국인들도 여전히 도시를 구획으로 읽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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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도로명 개정을 통해 새로운 이념을 과시하는 유행을 만들어 냈다. 전 세계 혁명 정부들이 집권과 동시에 거리 이름을 바꿨다.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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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조너선 하시드가 지적한 것처럼 중국은 거리 이름을 소수민족 지역을 감시하는 도구로도 사용했다. 사람들은 대개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닌 지역의 거리 이름이 더 다채로울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하시드에 따르면 현실은 그 반대라고 한다.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지역일수록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베이징의 거리 이름과 '더'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리 이름은 현지 주민들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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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거리 이름은 완벽한 정치적 선전 도구다. 별생각 없이 말하게 되는 것은 물론 주소를 불러 주거나 편지를 쓰거나 양식을 쓸 때마다 반드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국가가 거리 이름이라는 도구를 통해 국민들이 어떤 말을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나치 정부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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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삶이 예측 가능하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가고 있다고 안심시켜줄 만한 현재와 과거를 잇는 "서사적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은 기억을 모아 그 기억들을 공원에 동상으로 세우고 거리 이름으로 새기면서 억지로 미래 사회의 모습을 과거처럼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니까 과거를 기념하는 일은 현재에 대한 또 다른 바람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집단 기억을 지형지물에 새겨 간직할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말한 대로 "인간이 미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유일한 이유는 과거를 바꾸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래된 사진을 보정하고 전기와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실험실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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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마틴 루서 킹'으로 거리 이름을 짓자는 제안이 인종 갈등을 촉발하기도 했다. 1993년에 조지아주 어메리커스의 한 백인 소방 공무원은 도로의 반쪽을 마틴 루서 킹이라고 짓는 데 찬성하면서 대신 다른 반쪽에 킹을 암살한 제임스 얼 레이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에서는 마틴 루서 킹의 이름을 딴 도로의 표지판들이 로버트 E. 리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덧칠되는 일이 있었다.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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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에게 마틴 루서 킹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는 그저 또 하나의 흑인 지역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흑인 지역이란 언제나 슬럼 지역이다. 제아무리 좋은 공원이나 고급 부티크 상점이 들어와도 그런 사람들의 관점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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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들의 말에 따르면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주소였다. 노숙자, 홈리스(Homeless)란 문자 그대로 집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주소는 집이 아니다. 주소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과도 같다. 현대 사회는 주소를 통해 사람의 신원을 확인한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 투표할 때,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 때, 주소 증명을 제시하라는 요청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주소는 은행 직원이 우리 집을 방문할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현대 사회에서 나의 주소는 곧 나다.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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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란 하나만 없애도 차별을 막는 것은 물론 노숙자들이 구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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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주소가 없는 지역의 문제점은 이를테면 중국에서 탄자니아로 물건을 배송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물류 관리 전문가들이 말하는 "마지막 1킬로미터"이다. 설명하자면 물류 배송의 마지막 단계가 총 운송비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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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주소가 유일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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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나의 기대를 비껴갈지 모른다. 물론 인류 역사상 사람을 찾는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18세기 사람들은 정부 관리들이 무작정 마을에 쳐들어와 기름과 뼈 삶은 물로 만든 진한 페인트로 집집마다 번호를 표기하자 거칠게 저항했다. 집에 매겨진 그 숫자들로 인해 좋든 싫든 이제 누구든 자신을 찾을 수 있고 세금을 내야 하며 경찰은 물론 정부의 감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에 주소를 만드는 일이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426)
주소 이야기
The Address Book: What Street Addresses Reveal about Identity, Race, Wealth, and Power, 2020/디어드라 마스크
Deirdre Mask/연아람 역/민음사 20211126 496쪽 18,000원
짐작했던 대로 주소는 세금을 거두려고 생겼습니다. 그런 주소가 빈민촌을 바꿀 수 있고, 전염병도 막을 수 있습니다. 주소는 땅값을 올리기도 하고, 권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틴 루서 킹이라는 거리 이름을 두고 인종 갈등이 일어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지금의 주소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미래의 주소인 디지털 주소가 해법을 제공하지만, 개인의 정체성이 예속되거나 언젠가 유료화가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졌습니다. 디지털 주소는 기억을 제공하지 않지만 디지털 주소에 익숙한 다음 세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주소를 통해 본 역사와 세상 이야기는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한 주소 이야기는 재밌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있던 주소여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세금을 매기는데도 쓰이지만 복지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항상 나무님의 독서 포스팅을 보면, 제가 고르지 않는 분야의 지식들을 조금씩 얻어가서 좋습니다. 마음이 동하면 읽어보기도 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ReplyDelete예전에 본적이라는 것으로 성향이나 색깔을 단정 짓기도 한 시절이 있었죠. 책에서 언급한 한국에서 지번을 쓰다 도로명으로 바뀐 것도 나라에서 관리가 편해서 그렇게 바꿨다고 하고요. 코로나 유행 때도 가난한 주소지에서 더 아팠고, 지금도 여전히 주소로 재산의 많고 적음을 지레짐작하고요.
Delete제 독서목록은 두서없답니다. 블로그도 내용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 놓습니다. 와기님에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