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류근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상처적 체질/류근/문학과지성사 20100408(20240126, 초판 20쇄) 162쪽 12,000원

류근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1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2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3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삶은 방금 첫 꽃송이를 터뜨린
목련남무 같은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아도 음악이 되는
황금의 시냇물 같은 것이었다4

하루 종일 장래희망이 퇴근이었던 나는
풀려난 강아지처럼 성실하게
아랫도리를 흔든다5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6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시인에게 근황을 묻지 말자
시인이란 전과 다름없이 지내면서
대답할 필요도 없이 시를 쓰는 사람들이다7

사람을 만나면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으려는 기대 때문이었다8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는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9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10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놈들은 오징어 꽁치 고등어 멸치 들처럼 삽시간에 한 그물에 잡혀들게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한번 생각해보라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오징어 꽁치 고등어 멸치가 대오를 이탈해 제멋대로 쏘다니는 편이 그나마 그 무지막지한 그물에 일망타진되는 수모를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지 않겠나11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12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 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13


"이제 우리 다시는/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그립던 날들도 묻어 버리기/못다한 사랑/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시인은 무명시절에 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먼 전생에 쓴 유서였다고 밝혔다. 시집 《상처적 체질》은 그 시에 대한 주석이고 술꾼 류근에 대한 변명이자 참회록이다.


  1. 벌레처럼 울다
  2. 그리운 우체국
  3. 어떤 흐린 가을비
  4. 첫사랑
  5. 퇴근
  6. 상처적 체질
  7. 시인의 근황
  8. 極地
  9. 반성
  10. 너무 아픈 사랑
  11. 생존법
  12.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13. 獨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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