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2021년 여름은 뜨거웠다. 정치권도, 관련 학계와 단체도, 그리고 언론도 공포와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는 일부 혹은 다수 언론과 정치에 언제 뜨겁지 않은 계절이 있었겠느냐마는, 이른바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를 가능케 하는 조항이 담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두고는 사뭇 더 이례적으로 달아올랐다. 두고두고 자신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 개정 사안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 언론은, 그리고 그에 대해 '제각각의 이유로 동조했던 정치권 일각은, 언론자유 침해를 주된 반대 이유로 내걸었다. '언론재갈법'이라는 강력한 언사까지 등장했다. (4)
- '언론자유에 대한 위협을 경고하는 언론의 목소리'가 '실제로 보장되었던 언론자유의 크기와 범위'에 정비례하는 역설, 즉 언론자유가 작아질수록 언론자유 침해 주장은 줄어들고, 언론자유가 커질수록 도리어 언론자유 침해 주장이 늘어나는 역설에 해당한다. (25)
- 사실상 한국 언론의 다수는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대행하고 기타의 민주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언론자유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과 그에 연계된 이해관계의 원활한 확대재생산을 위해 언론자유라는 수단 혹은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익을 해쳐서라도 언론자유의 확대를 꾀하기보단 자유의 위축을 수용한 대가로 이해관계를 보장받는 길을 선택해왔다. (27)
- 언론자유에는 두 개의 층위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시민에게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이며, 이차적으로는 이를 대행하는 언론기관에 주어진 자유이다. 언론기관의 자유가 증진될수록 시민의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존재목적이다. 그런데 언론이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수록 오히려 시민의 자유가, 특히 약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향을 마주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제1역설이다. 또 언론은 억압하는 권력에게는 자유를 헌납하고, 관용하는 주권자와 그 대행자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남용한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제2역설이다. 나아가 언론은 정치권력과 시민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자유를 달라 하지만 자본이나 언론사주가 통제하는 자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언론자유의 제3역설이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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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와 다를 바가 없다면 두 가지 차이는 생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둘을 분리하여 따로 보호할 필요도 없다. 그럼 이 두 가지 자유를 같은 듯하지만 다르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언론의 자유에는 표현의 자유에 비해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63)
- 현대사회에서 언론은 더 이상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다. 언론이 정치권력과 자본권력보다 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치권력, 자본권력과 함께 지배블록을 형성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기득권의 힘이 여전한 가운데 언론의 힘이 강해질수록 줄어드는 것은 시민의 권능이다. 언론이 덩치가 커진 만큼 언론의 자유라는 특권을 조심스럽고 책임감 있게 휘둘러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작고 나약한 시민들이 다칠 수도 있다. 힘이 커질수록 그에 걸맞게 책임도 커져야 한다는 말이다. (68)
-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는지 감시하는 것은 주권을 위임한 시민의 권리이다. 주권자인 시민을 대리하여 권력을 감시하기 위해 언론의 자유라는 특권을 부여받은 언론이 그 특권을 제대로 행사하는지 감시하는 것 또한 시민의 권리이다. 언론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를 대행하는 이유는 개인의 표현자유가 조직과 자원을 갖춘 언론에 의해 대행될 때 훨씬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향유할수록 시민의 표현자유 또한 풍요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언론이 시민에 가져야 할 책임의 본질이 아닐까. 시민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언론이 자유로워지는 사회. 언론이 자유로워질수록 시민이 자유로워지는 사회. (69)
- 아이제이아 벌린(Isaiah Berlin, 2002)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와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로 구분하고 '간섭의 부재absence of interference' 혹은 '불간섭noninterference'을 의미하는 소극적 자유를 자유의 본질적 영역으로 봤다. 영미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소극적 자유에 대한 공동체의 간섭은 그 어떤 선량한 의도나 명분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소극적 자유로서 언론자유 또한 허가나 검열 같은 외부의 간섭 없이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지식이나 정보, 사상이나 의견을 말하고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75)
- 빌 코바치Bill Kovach와 톰 로젠스틸Tom Rosenstiel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The Elements of Journalism》(2014)에서 그 책무를수행하기 위한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중 우선적으로 언급된 다섯 가지도 결국 시민의 알권리 충족과 관련된 원칙이다; ① 저널리즘의 첫 번째 의무는 진실에 대한 것이다. ② 저널리즘의 최우선적인 충성 대상은 시민이다. ③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다. ④ 기자들은 그들이 취재하는 대상으로부터 반드시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 ⑤ 기자들은 반드시 권력에 대한 독립적인 감시자로 봉사해야 한다. (103)
- 만약 언론기관이 자신의 자유를 권력 감시에 쓰는 게 아니라 특정 권력 혹은 이익만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심지어 스스로 권력이 되기 위해서 쓴다면, 또 만약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 자유는 회수되어야 마땅하다. (127)
- 절대적이었던 개인의 표현자유 개념도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함께 상당 부분 상대화될 필요성이 생겼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증오발언hate speech이나 역사부정론 혹은 과학부정론 등의 온갖 부정론(denialism;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태도)이 독자적인 미디어 생태계를 구성하면서, 합리적이고 관용적인 체계를 위협하고 있는 조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요컨대 표현의 자유를 보편적 토대로 둔 언론자유 개념이, 헌법학적으로 보면, 주관적 공권 측면보다는 객관적 가치질서 쪽으로 점차 이동하고 있고, 따라서 이를 규율(즉, 보장하면서도 제한)하기 위한 입법이 필요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133)
- 출입처 제도의 개선이나 언론보도로 인한 피해 구제처럼 '사회적 책임'을 논해야 할 때에 오히려 보편적 규범으로서의 언론자유를 호출해 특수한 사익을 방어하려 들면서도, 정작 공영방송의 자율성이나 개인의 언론자유를 침범하는 정치권력의 행위에 대해서는 방어권적 연대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지 않는 의도적 혼돈, 이 자의적으로 흔들리는 바늘을 어느 누가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그렇게 흔들리는 바늘은, 지구가 형성하는 본원적 자기장magnetic field이 아니라, 언론의 편협한 자기이익과 기타 정치·경제·사회 권력의 각종 사익이 내뿜는 자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146)
- 나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언론 문제의 핵심에 '자유의 무능력'과 '신뢰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또 그만큼 수시로 망각되는 지점이다. (152)
- 언론이 현재 누리는 자유는 모든 시민에게 마땅히 부여되는 표현의 자유와 공적인 제도로서 누리는 특권적인 자유,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영업의 자유가 혼재되어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영업과 이윤 추구의 자유가 모든 자유 논의를 압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제도로서 언론은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누리지만, 최소한의 책임을 지려고 할 뿐만 아니라 공론의 장형성보다는 자신들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방기하게 된다. (184)
- 언론자유가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언론자유가 공동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언론자유는 언론사의 자유, 마음대로 이윤을 추구할 자유로 나아가기 쉽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더라도 사회적 대립과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사회가 정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언론자유는 언론사주 개인재산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Merrill, Gade, & Blevens, 2001). 이 말은 언론자유가 미디어를 소유한 사람의 재산에 대한 자유와 이와 관련하여 편집권을 시장의 원리에 맡겨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언론자유가 언론사의 이익 추구와 생존에만 복무한다면 공동체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하에서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보루가 아니라 지배세력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작용할 뿐이다. (195)
- 언론의 자유는 소극적인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소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을 자유freedom from이고,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이 온전한 선택을 통해서 자신과 관련된 어떤 결정을 내리는 자유freedom for를 의미한다(Berlin, 2002).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소극적인 자유가 좀 더 근본적인 인간의 자유 욕구에 가깝다. 적극적인 자유도 소극적인 자유가 있을 때 가능하고, 개인이 가지는 자율성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업적인 이익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언론 시스템은 소극적인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 (197)
- 언론자유 개념은 표현의 자유를 넘어, 의견 형성의 자유가 포함될 필요가 있다. 의견 형성의 자유는 벌린Berlin의 소극적인 자유 개념을 넘어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자유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있어 외부적인 압력이나 잘못된 정보를 받지 않을 자유를 광범위하게 포함한다. 적극적으로 꼭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떤 의견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 이성적인 공론의 장에 접근할 수 있는 자유는 기본적인 자유이다. 표현의 자유를 넘어 바르고 충분한 의견을 형성할 권리로 언론자유의 의미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의 언론자유는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자본주의에서 언론을 소유하고 자유롭게 시장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이런 자본주의 언론자유는 인권으로서 언론자유를 오히려 억압하거나 이성적인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225)
-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의 침해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권력 구조가 변화하는 때이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시민의 주권이 아니라 권력 구조에 의존적인 상태임이 이 시기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과 미디어와 관련하여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우리는 시민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245)
-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시장의 자유로 대체되면서 개인들의 사적·공적 의견의 표현과 공유 및 다른 개인들과의 교환을 통한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사회적 자유는 방치되어 정체되거나 후퇴하고 있다. 반면, 시장의 자유에 의한 기존 언론과 미디어의 표현과 주장들은 매우 역동적인 방식으로 확장되면서 자본과 정치와 기술의 독과점을 강화하고 있다. (267)
-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언론자유는 역설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딜레마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언론자유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자니 그것의 남용으로 인한 문제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언론자유를 제한하려 하다가는 말 그대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워버리는 우를 범하기 십상이다. (280)
- 평범한 시민과 정상적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폭정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언론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더 추가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은 현재의 언론이 자신의 자유를 제대로 쓰지 않아서, 폭정을 폭로하고 제어하는 데 그리고 타인의 언론자유를 옹호하는 데 사용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284)
- 저널리즘의 모순은 정thesis과 반anti-thesis의 충돌로 인한 저널리즘의 물리적 상쇄(즉, 소멸)보다는 새로운 저널리즘의 합성synthesis으로 나아가는 게 바람직하며 또 그럴 가능성이 대체로 높다고 우리는 믿는다. 언론자유에 대한 요구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일종의 상쇄간섭(destructive interference; 상이한 파동이 만나 서로를 없애버리는 효과를 낳는 간섭, 소멸간섭이라고도 함)이 아니라 오히려 정보와 소통의 신뢰라는 새로운 파동을 증폭시키는 일종의 보강간섭 constructive interference 효과를 산출하도록 하는 게 이 모순의 생산적 귀결을 지향하는 해법이다. (293
언론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정준희, 이정훈, 송현주, 김영욱, 채영길/멀리깊이 20221229 300쪽 19,000원
"언론자유가 작아질수록 언론자유 침해 주장은 줄어들고, 언론자유가 커질수록 도리어 언론자유 침해 주장이 늘어나는(25)" 걸 언론자유의 역설이라고 했다. 한국에 존재하는 언론은 "이익을 해쳐서라도 언론자유의 확대를 꾀하기보단 자유의 위축을 수용한 대가로 이해관계를 보장받는 길(27)"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언론기관은 언론자유를 "권력 감시에 쓰는 게 아니라 특정 권력 혹은 이익만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심지어 스스로 권력이 되기 위해서" 써왔고, 그 결과는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사용(127)"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언론은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할수록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권력에는 자유를 헌납하고, 관용하는 권력이면 자신의 자유를 남용한다. 더 나아가 정치권력과 시민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자유를 달라고 하지만 자본이나 언론사주가 자유를 통제하면 저항하지 않는다. 언론자유는 표현의 자유에 비해 상당한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언론이 언론자유를 제대로 쓰지 않으며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는지 감시하지 않거나, 특정 이익을 보호하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한다면 그 자유는 회수하여야 한다.
한국 언론과 언론자유에 대해 아주 고상한 학술적 견해를 펼쳤지만, 한마디로 You are not alone, 니들은 언론이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