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하루

10여 년 전, IMF 여파로 자금 유동성을 해결하려고 외자유치를 할 해외 투자사를 절실하게 찾던 시절. 급하게 날아온 협조문 한 장. 실사를 대비하여 부문별 현황을 영문으로 작성하되 현재 가치를 비롯해 미래 가치 즉, 핵심역량이나 노하우 등 지금 말로 하면 지식가치를 강조하라는 코멘트가 붙어 있었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H사와 동시에 받는 실사였기에 가치평가에 따라 투자사가 결정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한창 DJ가 빅딜을 강조하여 반도체 산업은 LG가 현대로 넘어가던 시절이라 실사 결과에 따른 투자 결정은 회사의 생사를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내가 속한 부문도 시급하게 자료 준비를 하려고 부서별 담당자가 모여 날밤을 까게 됐다. 그동안 만들어진 월말보고나 연보 등을 기초로 보고서용 목차가 정해졌고, 내용을 꾸미기 위한 자료들을 취합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한국식 보고서가 아니라 코쟁이 입맛에 맞는 리포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네들은 숫자와 도표 등 간결하고 한눈에 결론이 난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내부 보고서용은 물론 요약이 돼 있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이 구구절절 서술돼 있어 그네들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오는 이들에게 간결하게 핵심을 전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자료는 충분했지만 요약해서 몇 줄로 만들고 눈에 쏙 들어오게 도표로 만드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다들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쥐어짜며 새날이 밝아올 때쯤에 약 50여 쪽의 리포트를 만들 수 있었다. 아침에 임원과 부서장이 모여 리뷰를 하면서 수정을 했지만,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렇게 실사가 시작됐고 회사가 열심히 준비한 결과인지 자산가치는 H사보다 적지만 미래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종합 가치는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외자유치는 무산됐고, 그 결과 두서너 번의 또 다른 실사가 이어졌었다.

얼마 후 H사는 둘로 쪼개져 국내 회사로 인수됐고,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프랑스에 적을 둔 굴지의 화학회사가 50:50의 자본투자를 하게 된다. 그전에 투자유치가 되지 않으면 월급도 주지 못할 정도로 자금 유동성이 악화됐던 회사는 공장의 심장에 해당하는 유틸리티 설비를 외국회사에 매각했고, 수익이 나기 시작하던 공장 하나는 해외지분이 있는 동종의 계열사에 넘긴 뒤였다.

신기한 건 그렇게 어렵던 회사가 투자유치가 되면서 경기도 살아나고 연속되는 흑자를 내게 돼 말 그대로 보너스를 연봉의 절반 가까이나 받게 됐다는 것이다.

유추하건대 투자사는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게 분석을 해서 단계별 손익을 예상하고 투자를 결정했을 것이다. 여기서 냉정하게 분석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동일한 데이터를 가지고 우리는 정성적으로 분석하고 그들은 정량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이다. 같은 재무제표를 들고 앉았지만 우리는 나와있는 숫자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해석하고, 그들은 미래에 대한 손익으로 환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컨설팅을 받아 봤지만 마지막에 컨설턴트가 하는 말은 다 똑같았다. "제가 물가까지는 끌고 갈 수 있지만 물을 먹는 것은 그쪽의 선택입니다." 지금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외국에서 보는 시각은 한국 시장에 계속 경고를 보내지만 정작 한국 경제팀은 말 바꾸기와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1990년대 말 금융위기는 당시에는 큰일처럼 보였지만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위기에 비하면 '해변에서 보낸 하루'라면서 현재 위기의 심각성이 한국, 러시아, 브라질 같은 신흥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컨설팅은 훈수나 다름없다. 다음 수를 이렇게 놓으라고 권할 수는 있지만 그 수를 두는 것은 정작 자신이다. 취사선택을 하여야 하지만 혜안이 높은 훈수를 물리칠 정도로 내 판만 보고 있는 것은 이미 형세판단을 그르치는 것이다. 변명이나 해설은 판이 끝난 다음에 해도 된다. 지금은 훈수에 대한 미래예측을 냉정하고 열정적으로 할 때이다. 훈수에는 유감(遺憾)이 있을 수 있지만 느끼는 바가 있는 것(有感)이 더 중요하다. 결정적인 것은 훈수를 CEO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해변에서 하루만 보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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